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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칵테일 슈가 / 고은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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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칵테일 슈가 / 고은주 지음

입력
2004.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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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슈가고은주 지음

문이당 발행/9,000원

‘칵테일 슈가’라는게 있나 보다. 초콜릿 과자인 ‘빼빼로’처럼 생겼지만 초콜릿 대신 얼음사탕 조각이 나무 막대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 취향에 따라 커피에 녹여 먹도록 만든 설탕이라고 한다.

국내업체에서도 생산은 하지만 전량 유럽으로 수출한다니, 어지간해서는 구경도 못해 본 ‘모던’한 물건이다. 다만, 이 물건의 막대 끄트머리에 구슬같은 장식이 달려있어 뒤집어 세워놓고 보면 천상 ‘!(느낌표)’ 형상이라는 점만 염두에 두자.

뜬금없이 사탕얘기를 주워섬긴 건, 장편 ‘아름다운 여름’으로 오늘의 작가상(99년)을 탄 고은주씨가 8편의 중ㆍ단편을 묶어 첫 소설집을 냈는데 그 제목이 ‘칵테일 슈가’여서다. 그는 ‘유리바다’ 등 몇 편의 전작들을 통해, 모던한 공간에 사는 ‘포스트 모던’한 인물들의 ‘쿨’한 일상을 차갑고 마른 문체로 헤집어 그 ‘꿀꿀한’ 이면을 까발리는 데 이골이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표제작 ‘칵테일 슈가’의 유부녀 A는 B라는 유부남과 바람을 피우고, B의아내 C는 D라는 남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 D는 또 다른 여자 E와 약혼한 사이인데, E는 유부남 F와…등등, 이른바 불륜의 ‘줄줄이 사탕’이다.

이 관계들을 ‘칵테일 슈가’가 매개한다. A가 B와 ‘몸을 출렁인’ 뒤, 이놈을 건네며 하는 말. “느낌표를 닮았지? 느낌표의 달콤함만 즐겨. 심각한 물음표는 만들지 말고.” 사탕은 B에 의해 C에게 건네지고, D, E, F등의 손으로 릴레이 바통처럼 넘겨진다. 불륜에 뒤따르는 자책과 같은 찜찜한 감정의 거스러미를 한방에 날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쿨한 멘트와 함께다.

이네들에게 결혼은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한 이벤트’이고, 사랑은 설탕같은 순간적인 미감에 불과하다.

‘열렬한 사랑은 전설처럼 아득한 기억일 뿐’이고, ‘가정도 결국 동화같은 그림의 복제물’(‘조각무늬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결혼이라는 것이 무슨 엄청난 열정으로 유지되는 줄 아는 (어린)여자의 무모한젊음이 오히려 신선한 자극’(‘너의 목소리’)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성적인 방종과 발칙 발랄함으로 마치 개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오히려 획일적이다. ‘저기 내가 걸어간다’의 남자 주인공은 어느날 이메일 한통을 받는다.

동호회 홈페이지에 끼적인 그의 글들을 읽은 익명의 인물이 보낸 것인데,그 내용은 이렇다. ‘누구이기에 저와 똑같은 말투로 저와 똑같은 생각을말하고 있는 겁니까?’ 주인공은 ‘도플갱어’(자신의 분신 혹은 생령)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다르지만, 걸음걸이가 만드는 궤적은 은밀히 한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낀다. 개체의 자유란 환경의 지배 하에 놓인묶인 자유일 뿐이다.

그의 소설들은 극히 모던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소설적 문법은 흡사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고전들을 닮아 있다. 노골적인 작위와 과장된 에피소드들이 뻔해 보이는 줄기로 모여들지만, 서사가 완결되는 순간 커다란 덩어리로서의 해학과 풍자를 드러낸다. 메시지 역시 보수적이랄 만큼 고전적으로 읽힌다.

그 점에서 작가는, 결혼제도가 인간본성에 위배되고 성정치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점에 천착해온 상당수 젊은 작가들로부터 비껴 서있다.

다만 “가벼운 것(부부관계든, 연애든, 결혼제도에 대한 가치관이든)에 대해 풍자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소설 속에는 그 풍자의 신랄함은 은폐돼 있다. 고해소에 들듯, 발가벗고 읽어야 할 소설이다.

/최윤필기자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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