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8월21일 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고국 땅을 밟은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됐다. 51세였다. 마르코스 독재에 시달리며 아키노에게 희망을 걸고 있던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정권 교체의 꿈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세 해도 안 되어 꿈은 부활했고, '피플파워'로 불린 무혈혁명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의 장례식을 채운 수백만의 발걸음이 그 꿈의 소멸을 막아냈고, 그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그 꿈의 실현에 앞장선 끝에 말라카낭궁(필리핀 대통령 관저)의 새 입주자가 되었다.베니그노 아키노는 루손섬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마닐라타임스 기자를 거쳐 정계에 진출했고, 야당 리버럴당 간사장으로 국민적 인기를 누리며 대통령 마르코스의 최대 정적으로 떠올랐다. 마르코스는 1972년 계엄령 선포와 함께 아키노를 감옥에 가두었고, 다섯 해 뒤에는 조작된 살인미수죄를 뒤집어씌워 군사법정을 통해 사형을 선고했다가 다시 세 해 뒤인 1980년 심장병 수술을 명분으로 미국으로 추방했다. 아키노 부부는 미국에서 비슷한 처지의 김대중 부부를 만나 교분을 나눴다. 베니그노로서는 1950년 마닐라타임스 기자로 한국전쟁을 취재한 이래 한국과의 두 번째 인연이었던 셈이다.
1986년 코라손 아키노의 집권으로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필리핀에 들어섰는지는 확실치 않다. 예나 지금이나 필리핀 정치는 지주·자본가 출신 엘리트들의 과두정일 뿐이다. 아키노 부부가 그랬듯, 지금 대통령 글로리아 아로요도 최상류층 출신이다. 영화배우 출신의 직전 대통령 조셉 에스트라다가 세 해 만에 이른바 '제2의 피플파워'로 쫓겨난 것은 부정부패 때문이라기보다 '보잘 것 없는' 출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리핀 기득권층은 그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