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여당이 추진중인 과거사 진상규명작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군사정권이 종식된 이후 출범한 김영삼·김대중 정권에서도 중요한 국정의 화두였고,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기점으로 참여정부에서도 국가적 대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들 정권이 과거사 문제에 접근한 방식과 결과는 YS와 DJ, 노 대통령 개인의 통치 스타일만큼이나 차이가 났다.먼저 과거사 문제를 제기했던 계기와 명분이 달랐다. YS는 1995년 10월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4,000억원에 달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폭로하자 군 출신인 전직 대통령들과의 차별성 부각의 호재로 활용했다.
반면 경제위기 극복이 관건이었던 DJ는 과거의 병폐 치유와 국민통합을 강조하며 '제2의 건국'을 해법으로 내놓았고, 참여정부는 "21세기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라도 과거의 진상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가장 큰 차별성은 진상규명의 범위와 방식에서 드러난다. YS는 표적을 5,6공의 정통성과 비자금 문제로 한정해 강도 높은 검찰 수사를 벌임으로써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내란·반란죄로 사법처리하고 7,000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찾아냈다. 5·16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대한 부분적인 평가작업도 병행했다.
DJ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평가,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와 의문사위 설치 등을 통해 해방 이후로까지 범위를 넓히면서 법적·제도적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 방식에 있어서는 민관 합동기구로 제2건국추진위를 설립했고, 박정희기념관 건립 추진 등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간의 화해를 적극 모색했다.
이에 반해 노 대통령은 동학혁명기를 포함한 일제시대까지 범위를 확장하는 한편 개별사건보다는 과거사에 대한 포괄적 접근을 강조하면서 국회 차원의 특위 활동과 입법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또 화해를 전제로 하더라도 진상 규명이 본질적이라는 점도 분명히 한다.
결과도 달랐다. YS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결국 민정계·공화계의 축출로 이어져 정략적 접근이라는 비판을 불렀고, 아들 현철씨의 비리와 IMF 환란으로 당초 취지마저 퇴색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명확한 평가 없이 화해에 치중했던 DJ는 지지자들의 이반을 감수해야 했고, 두 아들과 측근비리가 불거지면서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참여정부의 경우 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중도사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청산 의지를 불태우고 있지만 야당과의 입장 차이로 특위 구성부터 난항을 겪고 있어 그 결과를 예측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서울대 한상진 교수는 "역대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집권세력의 의식을 상당히 투영시켜온 게 사실"이라며 "참여정부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 객관적 사실검증을 통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고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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