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당 "친일대상 넓힐 수도"19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의장의 사퇴 기자회견장은 과거사 청산을 향한 여권의 출정식과 같았다. 신 전 의장은 스스로를 성전(聖戰)을 앞두고 바쳐진 제물(祭物)으로 묘사했다. 그는 회견에서 "저의 아픈 가족사를 딛고 역사적 과업을 이뤄달라"며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신 전 의장의 과오는 부친의 경력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던 당내의 비판도 이날은 모습을 감추었다. 당장 우리당 지도부가 과거사 진상규명에 강렬한 의지를 재천명하고 나섰다. 이부영 신임 의장은 이날 "당이 친일청산이나 국가보안법 개폐 등을 추진하는 데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강조했고, 천정배 원내대표는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당의 의지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여권은 신 전 의장의 퇴진을 계기로 과거사 청산작업에 한층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나아가서는 내부의 논란을 잠재우고 정국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한 에너지로 활용하겠다는 자세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역 제의한 중립적 민간기구의 발족 방안 등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일축하는 분위기다.
우리당은 올 정기국회에서 친일문제 등 각종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입법활동에 당력을 총동원할 계획이다. 우선 체계적인 진상규명을 위해 '과거사 진상규명 기본법'(가칭) 제정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이는 문민정부 이후 국회를 통과했거나 제·개정안 형태로 제출될 예정인 15개 과거사 관련 법안의 '모법(母法)'에 해당한다.
우리당은 이 기본법에서 과거사 규명범위를 일제시대 이전 일제시대 광복이후 등 시기별로 분류하고, 과거사 관련 법안들의 목적이 보상과 처벌보다 국민통합과 화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포괄적 진실규명에 있다는 점을 명시할 방침이다.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에 규정된 필수적 조사대상(당연범) 범주를 군대의 경우 소위에서 오장(하사), 경찰의 경우 경시에서 순사까지로 확대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키로 했다.
우리당은 "친북·용공 활동도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한나라당의 요구에 대해서는 "입으로만 과거사 정리하자면서 하지 말자는 소리"라고 비난했다. 김영춘 원내수석부대표는 "국가공권력에 의해 과도하게 처벌되고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을 신원해 주자는 것인데 억지를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갑수 부대변인은 논평에서 "과거사 청산에 물타기를 하려는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가 측은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여권의 자세는 향후 전개될 '과거사 정국'이 이전투구식 혈전의 양상을 띨 것임을 예고한다.
/김성호기자 shkim@hk.co.kr
■한나라 "용공도 파헤치자"
여권의 과거사 공세에 수세적으로 대응해온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19일 역공의 승부수를 던졌다. 중립적 제3 기관이 과거사를 규명하고 "용공·친북 활동도 대상에 포함시키자"는 박 대표의 이날 대여 제의는 여권의 과거 공세에 대한 방어인 동시에 날선 공격으로 여겨진다.
박 대표는 15일 "국회에 과거사 규명 특위를 만들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제의가 나오자 마자 수용여부를 고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당 여의도연구소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과거사 규명 기구였던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면밀히 연구, 이날 역 제의의 초안을 잡았다는 후문이다.
박 대표는 결국 "과거를 털고 가야 한다"는 당 안팎 압박에 "지금은 민생 경제를 챙겨할 할 때"라는 논리만으론 대응의 한계가 있다는 판단을 한 셈이다. 또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사퇴로 여권의 파상 공세가 예상되자 맞대응의 시점을 당긴 것으로 보인다. 이날 승부수를 던진 박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연관에 부담 갖거나 신경 쓰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나 박 대표 제안은 대여 공세의 성격을 아울러 갖고 있다. 한나라당은 "규명주체가 중립적이고 검증된 학자들로 구성된 제3의 기관이 돼야 한다"고 유달리 강조한다. 규명주체는 우리당이 과반수를 점하는 국회나 정부의 손을 타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이는 향후 대여 협상과정에서 마지노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내용에 있어서도 현대사 전반을 포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 대표는 이날 "일제 시대 어떻게 나라를 뺏기게 됐는지, 해방 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할 때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 누가 6·25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고 그때 만행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부정과 무능의 주체는 누구이고, 5·16후 산업화의 공과는 무엇인지 규명해보자"고 덧붙였다. "한국 현대사 전반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훑자"는 얘기다. 친일, 유신 등 야당과 박 대표의 약한 고리만을 겨냥한 여권의 과거 규명 작업은 형평성을 잃은 정략적 냄새가 짙다는 게 한나라당의 시각이다. '친북 용공활동 규명'에 대한 강조는 대통령 장인을 겨냥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박형준 의원은 "친일을 규명하자면서 6·25때 부역한 사람들을 묻어놓고 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용공·친북이라면 군사정권이 수십년간 파헤쳐오지 않았느냐"며 "과거규명 물타기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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