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 시대에 행해진 강제 이주부터 한국전쟁 이후의 대규모 해외입양까지, 20세기 한국처럼 큰 격동을 겪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세계 각국에 있는 한민족은 비슷한 유전자를 지녔으면서도 완전히 다른환경에서 성장하게 됐지요. 제 연구는 이처럼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해 의미있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죠.”
17일부터 19일까지 열리는 ‘생물과학협회 정기 학술대회’와 ‘한국유전체학회 국제 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을 찾은 미국 컬럼비아대 게놈 센터 조셉 터윌리거(38) 교수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의 유전자를 연구하는데 4년 가까이 전념해온 유전학자다.
이른바 ‘한국인 디아스포라 프로젝트’다. ‘사방으로 흩어졌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디아스포라’는 흔히 세계 곳곳에 집단 이주해살면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로 쓰여왔다.
세계 한민족 유전자 샘플 모아 연구
터윌리거 박사의 연구는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해 정착한 한민족, 미국과유럽으로 입양되거나 이민간 사람 등 세계에 퍼져있는 한국인의 유전형질을 분석해 한민족 유전자 지도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쌍둥이 연구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들은 실제로 비슷한 병을 앓고 수명도 거의 같지요. 입양아연구는 같은 유전자를 지니고 다른 환경에서 자랄 때의 체질 변화를, 이민자 연구는 환경의 영향에 문화적 변화가 더해진 결과를 알게 해줍니다. 이같은 변수들을 모두 포함한 다각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는 거죠.”
가능한 많은 샘플을 모아 유전학적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얻어내는 터윌리거 박사의 방식은 ‘집단 유전학’이라 불린다. 그 동안 인류학자들이 해오던 종족 연구에 유전자라는 과학적 변수를 더한 방법이다.
샘플의 양이 많고 다양할수록 결과의 신뢰도가 높아지므로 그의 유전자 수집 작업도 끈기있게 이어진다. 동식물의 유전자 분석을 위한 샘플 채취와달리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연구를 위한 혈액을 모으는 일은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입양 가족 연구는 조심스럽게 접근”
2000년부터 2년간 연구 모델을 구축하며 협력할 기관을 구한 후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샘플 채취에 나선 터윌리거 박사의 현재 주 활동무대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다.
특히 출산장려 정책으로 인해 자녀 수가 나날이 늘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구 지역이다. 현재 ‘카자흐스탄 영양협회’로 바뀐 ‘한_카 한국국제협력단(KOICA) 친선병원’과 협력해 주민들의 혈액을모으고 주민들의 건강검진을 무료로 해주기도 하면서 흰 피부의 미국 박사는 지역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2002년 2주간 머물었던 중앙아시아 대초원 지역의 작은 마을 우스토비아,여러 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도 한민족이라는 혈통을 유지해온 연변의 고려인 연구도 빼놓을 수 없다.
터윌리거 박사는 “연구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이 지역 한민족, 특히 젊은이들의 이주가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이라면서 “정확한 유전자 발현을조사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찰과 연구가 필요하지만 한 차례 연구를 마치고 다시 같은 가족을 찾으려 했을 때 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설명했다.
시설이 열악해 혈액을 운반할 드라이아이스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병원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혈액을 채취하고도 연구를 잠시 멈춰야 했던기억도 생생하다.
입양아 유전자 샘플 찾기는 더욱 힘겨운 작업이다. 미국과 북유럽 등에 입양된 한국 사람은 많지만 유전학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부모를 찾은 이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케이스를 찾아도 이미 정신적부담을 많이 안고 있는 이 가족에게 윤리적, 혹은 심리적 문제를 일으키지않으려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과학자는 말하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지금까지 수집한 혈액 샘플이 300개에 달하지만 앞으로 최소한 15년 정도더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박사는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얻어낸 작은결론이라도 없는가”라는 질문에 “결과나 결론이라는 단어는 너무 위험하다. 연구를 마칠 때까지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신중하게답했다.
미국 피바디 음대에서 튜바를 전공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터윌리거 박사는 과학으로 눈을 돌린 이유에 대해 “졸업 후 생계가 막막했는데 이공계 대학원은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얹어주길래 주저없이 선택했다”며 웃었다.
언어에도 일가견이 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8개국어를 구사한다. 연구실에 매일 배달되는 한국 일간지 2개와 카자흐스탄‘고려일보’,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신문’과 ‘통일’을 꼼꼼히 읽는 것도 그의 일과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으로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꼽으면서 “과학적 성과에 대해 섣불리 단정하고 지나치게 과장하는것은 일반인을 잘못 인도할 수 있으므로 과학자는 자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늘 신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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