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8월18일 베이징(北京)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이른바 백만인 집회가 열리면서 문화대혁명(문혁)의 시동이 걸렸다. 광장에 모였던 홍위병들은 이내 전국의 주요 도시로 가 마오쩌둥(毛澤東)사상을 찬양하며 이른바 실권파들이 쥐고 있던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했다. 중국 대륙은 '혁명 속의 혁명'을 목격하고 있었다.문혁의 발단은 그 전해 상하이(上海)시 당위원회 서기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베이징시 부시장 우한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하면서 주어졌다. 야오원위안은 '해서파관'이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를 옹호했다고 비판했는데, 이 글을 계기로 베이징시 당위원회 안팎의 실용주의자들은 마오쩌둥파의 집중적 공격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이 분위기를 이용해 1966년 4월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을 해임한 데 이어 8월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했고, 열흘 뒤 그의 부름에 호응한 홍위병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짐으로써 중국은 '10년대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혁은 이념의 순결(紅)을 내세우던 마오쩌둥파가 전문기술과 지식(專)을 중시하던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 등 실용주의자들에 대해 벌인 노선투쟁이기도 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자신의 힘이 상대화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마오쩌둥이 혈기방장한 청년·학생들을 앞세워 벌인 무자비한 권력투쟁이기도 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뒤 부인 장칭(江靑)을 비롯한 이른바 4인방이 체포되면서 실질적으로 종결된 문혁은 그 진행과정에서 서유럽의 일부 좌파 지식인들로부터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험'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중국공산당은 1981년 '건국 이래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에서 문혁을 극좌 오류로 규정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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