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의 역사는 반세기를 훨씬 넘고 아직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의 많은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정치현상이다. 그러나 포퓰리즘만큼 작위적이고 혼란스러운 용어도 없다. 국내외 언론은 남미 정부들이 시장 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을 추진하면 이를 가리켜 흔히 포퓰리즘으로 지칭하여 왔다. 한국 언론은 곧잘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하였다.포퓰리즘은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0년 대를 기점으로 변신한다. 90년 대 이전과 이후의 포퓰리즘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경제정책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정치적으로 두 가지 모두 기성정치에 반대하여 서민층 지지를 통해 집권한다. 그러나 고전적 포퓰리즘이 분배를 중시했다면 세계화 이후의 현상인 신포퓰리즘은 시장친화 정책을 추진한다. 2003년 출범한 아르헨티나의 키르히네르 정부는 신포퓰리즘 노선을 걸은 메넴 대통령의 지나친 시장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집권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브랜드는 탱고와 포퓰리즘의 원조인 페로니즘이다. 탱고와 페로니즘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같은 부둣가에서 시작되고 번성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탱고는 관능미와 고도의 절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춤이다. 탱고는 오늘날의 그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쪽 부둣가 창녀들이 하역노동자들을 상대로 추던 춤이었다. 이 부둣가 지명이 오늘날 탱고의 관광지로 유명한 라 보카이다.
페로니즘 또한 라 보카에서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페로니즘은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후안 도밍고 페론은 육군 대령으로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여 한직인 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페론은 노동부 장관을 하면서 노조와 밀접해졌고 급기야는 노조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46년 대선에서 페론은 대통령직에 도전하였다. 페론은 라 보카 등 노동자 밀집거주지역의 대규모 지지에 힘입어 54%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조만이 아니라 산업가 세력도 페론을 지지했다. 이들은 페론이 전통적 지배세력인 농업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것을 희망했다. 페론은 집권 시 친노동정책을 통해 인기를 누렸다. 1989년 페론당 대권후보 메넴의 당선이 말해주듯 '페론 향수'는 언제라도 페론주의가 재등장할 정도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남미에서 포퓰리즘을 가능하게 한 것은 남미 특유의 과두제 정치이다. 봉건영주 격에 해당하는 까우디요를 정점으로 하는 지방 토호는 아직까지도 남미 곳곳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까우디요 권력의 전횡은 남미 사람들의 가슴에 정치와 정치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심어 놓았다. 정치인에 대한 반감은 정당을 비롯한 정치제도 전체에 대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나아가, 20세기 이후의 지속적 성장에도 성장의 과실은 과두제와 일부 산업가들이 독식하여 다수의 불만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이었다.
포퓰리즘은 바로 반정치의 정서를 기초로 한다. 어떤 점에서 포퓰리즘은 남미 최초의 '참여정치'이다. 포퓰리즘은 제도권 정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염증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넓혔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여를 했다. 또한 포퓰리즘은 대외관계에서는 자주적 외교정책이나 또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포퓰리즘은 경제정책에서는 서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포퓰리즘은 노조를 포함한 하층 및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한다. 실제로 페론 집권 (1946∼55) 10년 동안, 노동계급에 유리한 경제정책이 실시되어 여러 면에서 노동자의 삶의 질은 향상되었다. 반면 중산층에게는 고통의 10년이었다. 중산층 이상이 겪은 고통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기보다 심리적 그리고 문화적 충격에서 비롯됐다.
포퓰리즘은 시대상황의 변화에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정부(1983∼89)의 등장과 더불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9년 대선에서 페론당 카를로스 메넴의 대통령 당선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기득권층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메넴은 전통적 의미의 페론주의자가 아니었다. 메넴은 페론주의 전통으로부터 U턴 했다. 그는 포퓰리즘에 신자유주의의 내용을 채워 미국의 찬사를 받았다. 메넴 대통령은 민영화를 적극 추진하고 수입대체산업 포기를 포함하여 보호무역을 폐기하는 등 시장 친화적 정책을 강력히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 지지세력인 정규직 노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메넴의 러브콜은 비정규직과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에게 향했다. 이제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 페로니즘의 전략적 파트너가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네오 포퓰리즘에서 볼 때 기존 노조 또한 기득권층에 속한다. 그러나 네오 포퓰리즘의 정치동원전략 자체는 불변이다. 포퓰리즘 정치는 정치 자체를 혐오함으로써 구정치를 발본색원한다는 개혁을 명분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기존의 모든 정치를 부정하는 '반정치의 정치'를 내세운다. 포퓰리즘은 개혁운동을 앞세워 대의민주주의와 그 장치인 정당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정당정치는 칠레에 비해 제도화하지 못했다.
이점에서 현직 아르헨티나 대통령 키르히네르 또한 포퓰리즘과 무관치 않다. 그 역시 남부의 과거의 까우디요에 버금가는 권위주의 정치인이다. 2003년 대선 직전까지 그는 중앙 정계의 경험이 없는 남부 변방의 깨끗한 페론주의자였다. 누구도 키르히네르가 메넴을 누르리라고 예상치 않았다. 무명의 키르히네르가 메넴을 꺾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메넴 시절 이후 만연된 부패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반작용이다.
당선 후 국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깨달은 그는 개혁의 선봉을 자임했다. 외채 상환을 재촉하던 IMF에 대해서는 재협상의 '민족주의' 노선을 강조하여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키르히네르는 부패정치의 타파가 제1의 개혁과제임을 강조했다. 키르히네르의 이러한 반부패 구호는 기성 정치는 곧 부패라는 일반 시민들의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처럼 키르히네르 대통령은 '반정치의 정치'에 의존한다. 그는 선거과정에서 페론당의 정통파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 출신이자 당시 대통령 대행이었던 두할데의 지원을 받았다. 키르히네르는 당선 후 대법원을 개혁하고 부패척결을 강조했다. 두할데 등 페론당 우파를 부패 정치인으로 공격함으로써 높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스스로를 페로니즘 좌파라고 자리매김하는 키르히네르의 정치는 초기 페론을 닮았다. 앞으로 키르히네르 개혁의 성공여부는 경제에 달려 있다. 두할데의 평가절하정책 덕분에 경제는 취임 첫해 11%나 성장하는 호황을 누리지만 세계경제가 나빠지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 연구위원
협찬: 삼성전자
■포퓰리즘 권위자 베렌츠타인 교수 "現대통령 개혁 평가 아직 일러"
아르헨티나 포퓰리즘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해 세르지오 베렌츠타인 교수를 만났다. 베렌츠타인 교수는 토르쿠아도 디 텔라 대학에서 아르헨티나 정치와 선거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토르쿠아도 디 텔라 대학은 남미 포퓰리즘 권위자인 정치학자 토르쿠아도 디 텔라의 이름을 기려 설립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문대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로니즘이 태동한 곳으로 유명한데 언제 시작되었나.
"포퓰리즘은 역사의 산물이다. 남미의 특수한 정치경제 상황이 빚어낸 것이다. 나라에 따라 기원은 다르지만 아르헨티나, 브라질 및 멕시코에서 1930년 대 공황기를 기점으로 한다. 아르헨티나에 1930년 무렵 처음으로 포퓰리즘이 등장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1943년 쿠테타 이후 페론이 집권하면서부터다."
―페로니즘은 다른 남미 국가의 일반 포퓰리즘에 비해 강력한 유산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왜 페로니즘이 아르헨티나에서 특별히 강렬했다고 보는가.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은 특히 노동 친화적인 정책을 많이 써 노동계급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자본주의 발전이 앞서 노동계급이 일찍 발전하여 질과 양에서 노동운동이 발전했다. 페로니즘을 수용할 토양이 보다 좋았던 것이다."
―키르히네르 대통령의 높은 인기는 포퓰리즘과 관련 있나.
"경제정책 내용 면에서는 전임 대통령 두할데와 다른 게 없다. 키르히네르 대통령은 부패척결을 무기로 구 정치인을 공격함으로써 높은 인기를 누렸다. 평가를 위해서는 개혁을 더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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