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부친의 친일행적 및 은폐 의혹에 따른 거취문제로 막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신 의장의 마음은 사퇴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지배적 관측이다. 시간을 더 끌어봐야 여론만 악화해 여권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과거사 진상규명에 짐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당의 한 관계자는 17일 "이르면 18일 기자회견을 갖고 사퇴를 선언할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신 의장과 가까운 한 재선 의원은 "일본 헌병이던 부친이 고문을 자행했다는 증언이 18일자 일부 신문에 보도된 데 대해 신 의장이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도 했다. 신 의장이 18일 예정됐던 대구·경북 방문일정을 전격 취소하고 이날 심야에 천정배 원내대표와 회동한 것도 심상치 않다. 물론 신 의장 측근인 김형식 부대변인은 이날 밤 "신 의장이 사퇴결심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지만, 야당은 물론이고 당내에서조차 문책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신 의장의 선택 폭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신 의장 본인도 이날 낮까지 "당의 중지를 모아 결정하겠다"며 즉각적인 사퇴를 거부했으나 "사심 없이 밝힐 것은 밝히고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할 일은 하겠다"고 말해 사퇴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이에 앞서 우리당은 원내 대표단 회의를 열고 "지금은 신 의장의 거취 문제를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며 일단은 신의장 체제를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었다. 김영춘 원내 수석부대표는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거나 연좌제적 발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신 의장을 엄호했다.
그러자 당내 소장파를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터져 나왔다. 안영근 의원이 "신 의장은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등 일부 의원이 공개적으로 사퇴를 요구했고, "의장직 유지가 과거사 청산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는 여권 지지자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사실을 은폐 또는 거짓말을 한 사람을 여당 대표로 놔둘 수는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문제는 신 의장이 물러날 경우 발생할 지도체제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이다. 내년 1월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앞당기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신 의장 다음 순위인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이 의장직을 승계토록 하는 것도 찜찜한 게 사실이다. 신 의장의 사퇴는 여당의 역학구도 변화를 몰고 올 강력한 변수가 되는 셈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암초 만난 與 "親日 규명"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부친의 친일 및 은폐의혹이 불거지면서 과거사 진상규명을 본격화하려던 여권의 계획이 난관에 봉착했다. 우리당은 특히 신 의장이 의장직을 사퇴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여당이 과거사 청산을 주도할 만한 도덕성을 갖추고 있느냐"는 비난을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당은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과거사 규명이 중단 없이 추진될 것임을 강조하는 등 과거사 규명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데 치중했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원내대표단 회의에서 "과거사 규명의지에 전혀 변화가 없으며 오히려 더욱 굳건히 모색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파문이 정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정청래 의원은 "부친 문제는 부친 문제일 뿐"이라며 신 의장을 방어했고, 문희상 의원은 "공교롭게도 여야 대표 모두 부친의 친일문제가 걸렸다"며 은근히 한나라당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내에는 신 의장이 선친의 일본군 경력을 숨겨오다 뒤늦게 시인한 것만으로도 여권의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이날 밤 신 의장의 사퇴설이 흘러나오자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지만 역사 바로세우기의 명분이 퇴색될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대표적인 친일문제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은 "민족사를 바로잡는 일은 정치인 한두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중차대한 일"이라며 "대통령이 직접 과거사 진상규명 의지를 밝힌 만큼 이번 파문 때문에 이 작업에 차질이 빚어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거짓말만 정조준 한나라 "제한 사격"
한나라당은 17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과 관련, 신 의장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춰 "파렴치한 양의 탈을 쓴 늑대""이중적 행태" 등 맹공을 폈다. 하지만 신 의장 부친의 행적 자체에 대한 비난은 삼가며 "아버지의 죄를 후손에게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신 의장이 과거사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모양새가 될 경우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에 몰아칠 후 폭풍을 우려한 것이다.
김덕룡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신 의장이 자기 부친 관련 의혹을 제기한 언론에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순백한 것처럼 행동해 왔기에 실망이 크다"고 비난했다. 김형오 사무총장도 "진흙탕에 빠진 신 의장이 옷에 진흙 묻은 사람은 모두 퇴장하라고 하는 우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친일행적을 비난하거나 신 의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발언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일을 자식에게 책임 전가하는 것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시대에나 있었던 일"(김 사무총장), "여당은 신 의장을 희생양 삼아 벼랑 끝에 몰아세우면 안 된다"(전여옥 대변인) 등 신 의장의 사퇴를 반대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 전날 신 의장의 사과에 대해서도 "거짓말 한 것을 사과해야지, 아버지 잘못에 사과하는 것은 연좌제를 하자는 것인가"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나라당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과거사 문제가 걸린 박 대표를 보호하고, "아무도 과거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국민에게 거짓말 한 여권이 과거를 단죄할 자격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켜 여권의 과거사 규명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다. 한 고위당직자는 "신 의장이 과거사에 책임을 진다는 명분으로 사퇴하는 것을 시작으로 박 대표에 대해 '물귀신 작전'을 펴면서 과거 캐기 총공세에 나서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다"고 말했다. 이규택 최고위원은 "이번 사태와 박 대표는 아무 유사성이 없다"며 "거짓말을 했는지 여부, 부친의 과거가 공개 됐는지 여부 등에서 박 대표와 신 의장은 다른 케이스라는 점은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