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문제였다. 무더위는 다음이었다.섭씨 35도를 오르내리며 살갗을 찌르는 아테네의 무더위는 차라리 양반이다. 예고 없이 휘몰아치는 돌풍에 ‘난다 긴다’는 선수들도 추풍낙엽이었다. 양궁 사격 수영 등 야외에서 펼쳐지는 종목에는 아테네발 ‘돌풍주의보’가 발효됐다. 올림픽 전사들을 괴롭히는 바람은 ‘멜테미’. 매년 8월그리스를 찾아오는 강한 바람인 멜테미에 웃고 멜테미에 운 사연도 속속 접수되고 있다.
개미 손톱만큼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 양궁. 특히 파나티나이코스타디움은 바람 잘날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초속 2~5m를 오가는 돌풍에 모래까지 휘날린다.
시드니(2000)올림픽 남자 양궁 개인전 금메달리스트 사이먼 페어웨더(호주)는 16일(한국시각)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올림픽 2연패를 노리던 명궁은바람 때문에 2점 과녁에 화살을 흘리는 등 황당한 경기로 1회전(64강)에서탈락했다. 그는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연발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전날엔 여자 양궁 순위 결정전 9위의 나탈리아 발레바가 바람에 밀려 1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뿐 아니다. 명색이 각국 국가대표로 나선 궁사 중엔 바람에 밀려난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 ‘생애 첫 0점’을 경험한 사례도 수두룩하다.
클레이사격에선 엔트리 꼴찌가 메달을 따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야 하는 수영 접영에선 쟁쟁한 선수들이 탈락하는 등 바람이 만든 이변은 연일 속출하고 있다. 심지어 조정은 강풍주의보 때문에 경기가 연기되기도 했다.
다행히 아테네의 강풍은 한국에겐 아직 ‘덜 적군’이다. 연습 한번 하지않고 나선 클레이 사격 여자 트랩에서 올림픽 사상 첫 메달(동)을 딴 이보나(23ㆍ상무)는 바람 덕을 톡톡히 봤다. 그는 “실력 차이를 감출 수 있게 바람이 많이 불길 바랐다”며 “강풍 탓에 나는 오히려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 양궁 역시 ‘바람잡기’에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신궁으로 불리는 한국 대표팀은 초반 5~8점을 쏘며 애를 먹었지만 날이 갈수록 국내에서 준비한 ‘풍훈(風訓)’의 덕을 보고 있다. 여자팀 서오석 감독은 “바람 때문에 경쟁자들이 초반에 탈락해 오히려 득”이라고 귀띔했다.
아테네=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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