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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떳떳한 가난을 자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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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떳떳한 가난을 자랑하자

입력
2004.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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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고려와조선 시대의 한문 고전 수필 64편을 모아놓은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을 쓴 사람들은 모두 당시 ‘한 자리’했던 지도층 인사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점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이렇다.“다행히 나에게 초가가 있어 내 몸을 보호하기에 족하고, 거친 음식이지만 나의 굶주림을 달래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나의 타고난수명을 다할 생각이라네”(권근).

“집안은 거칠어지고 가난에 찌들어 쓸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식 항아리에는 한 말의 곡식도 남아 있은 적이 없고, 상자에는 옷감 몇 필도 갈무리해 놓은 것이 없었으니…빚을 내야만 아침 저녁으로 죽이나마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홍우원).

“그때 나는 정말로 사흘째 굶고 있었는데, 행랑살이하는 사람이 남의 지붕을 이어주고 품삯을 받아 와서야 겨우 저녁밥을 지었다”(박지원).

심지어 먼저 떠난 보낸 부인을 그리워하는 제문에서조차 자신의 가난함을강조한다. “내가 천성이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아 늘 양식이 떨어졌는데도 당신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쓰라린 가난을 잘도 참아냈으며, 물욕에 마음을빼앗기는 일 없이 거친 음식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도 오히려 담담했습니다”(김종직).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가난한 것이 자랑스럽고 떳떳한 그런 세상을 살았다. 물론 그 당시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다 가난함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매일 돈이 생길 구멍을 찾아 다니다가털끝만한 이익이라도 보이면 서로 머리가 터지게 다투어서라도 얻은 재물을 자손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쓴다…(하지만)

나는 가난 속에서 분수대로 사는 생활을 즐긴다”(성현).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추구해도 나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선택’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에서는 이러한 선택은 불가능해 보인다. 모든 가치는 다 돈으로 평가된다. 가난은 곧 무능함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장사하는사람들은 부자인 것이 자랑이듯이, 학문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것이 자랑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가난함은 어떠한 존경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세속적인 가치에서 한걸음 떨어져서 자유로운 정신을 지켜야 할 대학까지 돈이 지배한다. 돈벌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학문은 다 죽어가고있다.

모든 학문이 산학협동이라는 이름으로 돈벌이 전선에 나서길 강요받는다.물론 응용학문은 필요하고 현실과 연계될수록 좋다. 하지만 돈벌이와 전혀상관없어 보이는 학문도 필요하다.

오히려 그러한 학문에 더 똑똑한 인재들이 몰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돈 이외의 가치를 숭상하는 다양한 가치관의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정신을 지켜가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당당하고 떳떳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만히 앉아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 사회에 대해 일말의미안함이라도 느끼기는 가치관을 지니기를 바란다.

물론 졸부일수록 마음이 허하고 불안해서 자신의 가진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세울 것이라곤 돈 밖에 없는 그러한 졸부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게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당당하고 우아한 문화가 자라나길 바란다.

적어도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는 돈만이 모든 가치의 척도라는 관념을 심어주지는 말자.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전통이오랜 서구 여러 나라들의 귀족들처럼 우아함과 청렴함과 겸허함을 지닌 품위있는 부자 문화를 가꿔가길 바란다. 그리고 요즈음 지도층에 계신 분들은 자신의 가난함을 후대에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김주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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