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완장(腕章)이란 부정적 이미지로만 다가오는 걸까. 우리 대통령은 일부 언론매체를 향해 ‘완장문화’ ‘군림문화’라 했다지만 우리는 지금 도처에서 온갖 완장을 본다.공명선거, 투기단속반, 백두대간 지킴이, 주차관리, 긴급복구반, 민방위, 청소년선도, 구급요원, 시민참관단 등등 글자 그대로 완장문화를 실감케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완장에 대한 상념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게다. 윤흥길은 소설 ‘완장’에서 교장의 입을 빌려 말한다. “집안 어르신을 돌아가시게 맨든 죄를 만천하에 자복허는 뜻으로다가 사람들은 상장(喪章)을 둘렀다.” 이렇게 완장은 미풍양속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신천희는 동화 ‘대통령이 준 완장’에서 댐 건설로 고향집이 수몰된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기자는 ‘주번’ 완장을 두르고 ‘뭔가 봉사한다는 기분에 꽤나 으쓱대던’ 초등학교 시절을 흐뭇해 했다. 건널목의 ‘교통신호등’ 할아버지 완장은 어린 생명들을 보호한다.
일제 말기에는 군수물자 조달에 동원한 여학생들에게 ‘학도대’ 완장을 채웠다. 히틀러는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별 표시를 한 완장, 세르비아인에게는 정교회를 표시한 P자 완장을 강제로 두르게 했다. 그가 살아 있다면 언론매체에 ‘군림’ 완장을 채울까? 일제 강점기와 6ㆍ25 때 완장의 만행을 상기하며 치를 떠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11일자 한국일보 ‘지평선’에서 강병태 논설위원이 지적한대로 완장은 ‘흔히 별 것 아닌 권력을 갖고 한껏 으스대는 꼴을 비하할 때 쓰는’ 상징적 용어다. ‘완장 찬 권력은 보이지 않는 거대권력의 심부름꾼이다.’
이것이 부정적 완장문화의 속성이라면 척결 대상 우선순위는 지난날의 마패처럼 숨겨진 채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코드 완장’이 아닐까. 붉은 머리띠나 누런 어깨띠는 완장부대와 얼마나 다른가?
지난해 6월 남북 장관급 회담을 취재하러 입국한 홍일점의 조선신보 기자는 녹색완장을 두른 모습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6ㆍ25 당시만 해도 북한에서는 기관이나 기업소뿐 아니라 초등학교에서도 학급신문을 맡은 학생은 벽보주필(壁報主筆) 완장을 찼다. 푸른색 한 줄 반의 기세는 반장을 뺨칠 정도였다. 아무튼 지금 우리 신문기자들은 주로 완장을 두르나, 목걸이를 거나?
문득 어느 영국 정객의 말이 떠오른다. “미디어를 향해 투덜대는 정치가는 바다를 향해 투덜대는 선장과 다름없다.”
조영일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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