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가 1958년(당시 전매청)부터 자체 작성한 담배 연구문서가 16일 처음 공개됨에 따라 5년을 끌어 온 ‘담배소송’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별도로 진행된 정보공개 소송에서 법원은 지난해 6월 소송 당사자에게만 78년 이후 일부 문건에 대한 열람을 허용했지만 공개는 불허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국가와 KT&G가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알고서도 수 십년 간 알리지 않았음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
69년 작성된 내부 보고서에 이미 “담배 물질 중 일부가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으며, 동물에 대해서는 “니코틴이 과다할 경우 사망하게 된다”는 연구결과가 58년부터 등장한다. 하지만 KT&G측이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에 따라 담배 표지에 “흡연이 폐암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문을 표시한 것은 89년이다. 보고서대로라면 담배의 발암성 등을 국가와 KT&G측이 20년간 숨겨 온 셈이다.
그 동안 담배소송에서 가장 쟁점이 됐던 것은 국가와 KT&G측이 담배의 유해성 등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여부였다. 원고측은 “국가 등이 담배의 유해성과 폐암 유발성 등을 일찍부터 알았으면서 이를 은폐하는 바람에 모르고 수 십년 간 담배를 피워오다 암에 걸리게 됐다”고 주장했고, 피고측은 “흡연과 폐암의 상관관계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맞서왔다. 따라서 이번 문서 공개로 원고측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됐다.
국산담배가 외산담배보다 유해물질이 많고 질이 낮다는 자체 연구보고도 60년대 초부터 98년까지 자주 언급된다. 배금자 변호사는 “공개되지 않은 일부 문서에는 KT&G 경영진들이 외산담배보다 국산이 더 유해하다는 사실을 두고 서로 걱정하는 대화 내용도 들어있다”고 말했다.
89년까지 외산담배의 수입이 허용되지 않았고 당시 국가 기관인 전매청이 독점적으로 담배사업을 해왔던 점을 감안할 때 국가 역시 “자국민에게 더 유해한 담배를 피우게 했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여성과 태아에 대한 피해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79년 작성된 보고서에는 “니코틴 등이 산모의 호르몬 분비를 교란해 기형출산, 유산 등을 초래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으며 “니코틴이 태아의 뇌신경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내용도 2000년 보고서에 들어 있다. 또 간접 흡연자가 마시는 담배연기가 직접 흡연자가 마시는 연기보다 더 해롭고 발암물질이 더 많다는 사실도 90년부터 등장한다.
하지만 아직 재판 결과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먼저 KT&G측 변호인은 “과거 연구문서는 열악하고 외국의 연구결과를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라며 이번 공개된 문서의 의미를 평가절하 했다. 재판부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가 관건이다.
또 이 자료가 소송의 직접 당사자인 원고들이 담배로 인해 폐암에 걸렸다는 직접 증거가 될 수는 없는 만큼 서울대병원에 의뢰한 원고들의 신체감정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가 또 하나의 중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 외국 사례
담배 소송은 미국이 주 무대다. 집단소송으로 원고가 수십만 명이 되는 경우도 있고 징벌적 배상액수가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평결도 있다. 현재 담배 회사들에 제기돼 있는 소송만도 1,000건을 넘고 잇다.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1998년 정부와 담배 회사의 쟁송에서 나왔다. 당시 46개 주정부는 담배 회사가 환자들의 치료비 명목으로 2,460억 달러를 주기로 하자 소송을 취하했다.
이 뉴스는 개인들의 소송 러시를 촉발시켰다. 수 많은 소송 중에서 가장 큰 징벌액은 2000년 7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순회법원 배심에서 나왔다. 마이애미 배심은 50만 명의 피해자에게 5개 담배회사가 1,450억 달러(174조원)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이어 2002년 로스앤젤레스 고등법원 배심은 베티 블록이라는 여성이 필립모리스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280억 달러의 배상을 평결했다. 이 평결이 나오자 미국 담배회사들은 파산신청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최근의 경우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이 13일 "말보로 라이트는 다른 담배에 비해 건강에 덜 해롭다"는 필립모리스의 광고를 상대로 흡연자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필립모리스는 건재하다. 그 이유는 항소를 통해 평결을 뒤집고 징벌액수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베티 블록도 항소 과정에서 배상금이 2,800만 달러로 줄었고 최종 판결을 받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소송 건수 중에서 실제 배상금을 손에 쥐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이애미 소송의 경우에도 2003년 5월 플로리다 항소법원은 1심 평결을 기각했다. 또 그 해 10월 미 대법원은 오리건주의 제시 윌리엄스가 1심에서 얻어낸 7,950만 달러의 손해배상 평결을 파기하고 "적정한 선에서 배상액을 다시 정하라"며 원심인 오리건주로 돌려보냈다. 미 대법원은 2003년 4월 징벌성 배상액이 실질 손해의 10배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침을 밝힌 바 있다.
일본에서는 피해자에게 훨씬 엄격하다. 2003년 도쿄 지방재판소는 폐암 환자 등 6명이 1인당 1,000만 엔을 요구한 소송을 기각했다. 담배 소송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인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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