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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위의 이야기] 누구 기억에나 하나씩 있는 창백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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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위의 이야기] 누구 기억에나 하나씩 있는 창백한 이미지

입력
2004.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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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 익은 청포도를 볼 때마다 뒷집 옥순이 누나 생각이 난다. 얼굴이 매우 하얗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다닐 때보다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가 더 많은 누나였다. 중학교에 들어가 ‘소나기’를 처음 읽었을 때 아, 그 누나 같은 아이인가 보다 했을 정도로 몸이 약하고 예뻤다.그 누나가 가장 멀리 출입하는 곳이 우리집 마당과 마루였다. 어느 해 여름엔 나와 내 동생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기도 했다. 우리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손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 겨우 불그스름한 물이 들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푼 옥순이 누나의 손은 너무도 예쁜 인주 빛깔의 물이 들어 있었다.

누나가 내려오면 어머니가 참 많은 것을 챙겨주었다. 그러나 누나는 청포도 한 알 바로 입에 넣어 깨물지 못하고, 봉숭아 물을 들인 손으로 껍질을 발려내고, 다시 그 안의 씨까지 발라낸 다음 겨우 입안에 넣고, 온 몸이 오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런 누나의 얼굴을 재미있어 하고, 어머니는 돌아서서 한숨을 지었다. 지금도 나는 청포도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많이 아플 때가 있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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