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이 그토록 그리던 해방된 조국의 광복 기념일입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나마 편안히 눈을 감으세요"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경기 여주군 여주교도소 인근 야산. 김춘식(53·회사원)씨는 부모님 묘소에 참배한 뒤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아랫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60년 만인 지난 6월 화장돼 돌아온 형 김백식씨의 유골이 뿌려진 곳이다. "부모님과 함께 고향 땅에서 조국 광복일을 보게 됐으니 형님이 얼마나 감격에 젖어 있을지 눈에 선합니다." 긴 한숨을 토해낸 김씨는 산아래 자신의 집으로 내려와 기자에게 낡은 사진 한장을 내보였다. 1944년 일본군에 징병으로 끌려갔던 형 백식씨의 모습이 닳고 닳은 흑백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누나로부터 들은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집에서 농사를 거들던 형님이 20세 때 일본 군대에 끌려갔고 그 후 전혀 생사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맏아들이었던 형의 소식이 끊어지면서 화병이 난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등 가족의 고초도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수십 년이 흘러 아득하게 잊고 있던 형 백식씨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2000년 봄. 전쟁 중 숨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형이 일본 도쿄(東京) 부근 고다이라시의 국립정신병원에 수용돼 있다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일본의 한 법무사가 전해주었다.
이후 일본 측으로부터 전해들은 백석씨의 56년간 일본생활은 이랬다. 징병후 1년 만인 1945년 신경장애 증세가 나타나 정신병원에 수용됐으며 아무런 연고가 없어 여태껏 병원에서 혼자 투병생활을 했다.
노년에는 암 증세까지 나타나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일본 당국에서 자료를 뒤져 김씨에게 연락을 하게 된 것.
고인의 유골은 병원 인근 국평사(國平寺)에 안치됐다가 지난 6월 주변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부모 묘소 곁에 뿌려졌다. 백석씨의 이런 징병 이후의 투병기는 일본 아사히 신문에 '뼈(骨) 이국의 병동, 마음을 닫은 채'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천식이 심했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징병 갔다 돌아온 형 또래들의 결혼식이라도 열리는 날이면 하루 종일 장죽을 피워 대시곤 했죠.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을 때는 남들처럼 돌아오지 못한 형을 많이 원망했지만 막상 일본에 가 형이 평생을 지냈던 병실을 바라보니 50여년을 외로움에 사무쳐 보낸 것 같아 눈물만 나더군요"
김씨는 여태껏 생사가 확인이 안돼 남아있던 형의 호적을 정리하기 위해 일본 측 지인을 통해 사망증명서 발급수속을 밟고 있다. 수속 중에는 백식씨가 일본 병원에서 촬영한 노년기 사진을 건네받기도 했다.
그는 "사진을 보는 순간 마치 돌아가신 아버님을 다시 보는 것 같아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사진을 찍었을 때라도 연락만 됐다면 어떡해서라도 고국으로 모셔왔을 텐데…"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