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푸르른 틈새(1996년)’로 문단의 주목을 끈 권여선씨가 8년 만에 소설집 ‘처녀치마’를 냈다. 내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만 읽어 준다면,내가 쓴 것은,…오랜 세월 끈질긴 스토커로서 써보낸 뒤늦은 연애편지라 믿고” 싶단다.그리고 “이제 편지를 찢는다”고 했다. 연애의 상대를 바꾸겠다는 다짐인지, 다만 방식만 재고하겠다는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쩌면 둘 다를내포한 (문학적) 변신 선언일수도.
그녀의 ‘연애편지’는, 찌는 날, 잘 갈아 적당히 앙금 앉혀 식힌 콩국 같다. 근기(根氣)를 찾자면 잘 저어 알뜰히 마셔야겠지만 치뜬 앙금까지 넘기기엔 어쩐지 부담스러울 듯한 느낌이랄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너나없이 서글픈 운명에 덤덤하거나 덤덤해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군상들이다. 아등바등해봐야 운명이라는 놈은 ‘운명적으로’운명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삶을 냉소하지 않는다.
잘 나가는 한 일본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회전목마의 운행시스템에의해 규정된 인생 혹은 그 목마의 궤도에 얹혀 도는 삶의 무력감, 패배주의자의 자포자기와도 다르다. 다만 덤덤히 바라보거나 스쳐 지나갈 뿐이다.
표제작 ‘처녀치마’의 주인공은 두 번의 이혼이력을 지닌 오래 전 남자와사귄다. 하지만 그는 “하나 뿐인 목까지 내걸고 그를 사랑한다 해도 내가그에게 아무 자극도 영감도 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어떻게 치장하더라도 오래된 사랑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남루해진다는 것도운명이라면 운명 아닌가. “연고도 없는 고향을 향하는 길을 엄숙하게 귀향이라고 부르는 건 계산대 앞에서 돈 한푼 없는 주머니를 자꾸 들척이는일처럼 비루하지만, 그러나 고향은 고향”인 것처럼 말이다.
‘트라우마’는 “시위 눈칫밥을 꽤 오래 씹었다고 자부”하며 철거 직전의 산동네 아파트에 사는 화자와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술판으로 이야기가시작된다. 하지만, 한때 적이나 끈끈했을 법한 이들의 유대는, 세월(혹은운명)이 벌려놓은 각자의 편차로 인해 “유대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유대”일 뿐이다.
그들은 한때 추구했던 유토피아의 꿈을 ‘우-토피아’라는 게이바에서의 취기로 달래고, 거대한 무엇에 대한 저항의 열의는, 아파트 경비원 앞에서고지서를 찢어 던지는 객기로 치환된다 (평론가 이수형씨).
작가가 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고, 전 작품 ‘푸르른 틈새’가 더러 그세대의 ‘후일담’으로 읽혔듯이, 이번 소설집도 그들의(아니 우리들의) 삶에 띄우는 ‘오랜 세월 묵혀뒀던’ 연애편지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그렇다면 작가가 기억의 앙금을 소설 속에 고이 가라앉힌 까닭도 이해될 듯 싶다. 시린 옛사랑의 추억이란 대체로 버릇없이 키운 고양이 같은 존재다. 이를 에둘러 작가는 “삶의 우연들이 배태한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이들에 대한 위로의 글로 읽어달라”고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제 그만 이 편지를 찢겠다고 한다. “지금껏 편지나 일기를 썼다면, 이제 이야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어요.”
/최윤필기자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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