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년 8월11일 독일의 체조 교육가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이 란츠에서 태어났다. 1852년 졸(卒). 독일 사람들에게 얀은 '체조의 아버지'(Turnvater)로 불린다. 그가 고안한 독일체조는 페르 헨리크 링이 고안한 스웨덴체조와 함께 세계 체조의 양대 조류를 이룬다. 두 체조의 장점을 묶어 프란스 나흐테갈이 창안한 덴마크체조를 여기에 더해 세계 3대 체조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독일체조의 산실은 1811년 베를린 교외 하젠하이데에 얀이 처음 연 노천체조장(Turnplatz: 일종의 체조학교)이었다. 얀의 헌신적 노력으로 체조운동은 이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쌍두(雙頭)체제 속에서 수많은 나라들로 갈려있던 독일 민족을 하나로 묶는 띠가 되었다. 할레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신학과 문헌학을 공부한 얀이 스포츠에 눈길을 돌리고 체조를 창안한 것 자체가 민족적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프로이센군에 복무하며 조국이 나폴레옹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것을 울분으로 지켜봐야 했던 얀은 스포츠가 독일 어린이들의 성격을 강인하게 하고 애국심을 함양해 문화와 언어공동체로서의 독일민족을 지탱할 동량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리라고 판단했다.
얀 자신이 때로는 군인으로 때로는 교육자로 그 시대 독일인들에게 애국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민족주의가 진보적 가치를 지녔던 시대에 헌걸찬 민족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얀의 민족주의적·민주주의적 사고와 행동은 때로 당대 독일 지배계급과의 충돌로 이어져, 1819년에는 노천체조장이 폐쇄되고 그 자신 얼마간 옥살이와 가택연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전쟁 때의 공훈을 인정 받아 1840년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철십자가훈장을 받았고, 1848년 3월혁명기에는 독일 통일운동의 이정표가 된 프랑크푸르트국민의회 의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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