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지금 아르헨티나는 겨울이지만 한국으로 치면 봄에 가깝다. 따스한 봄은 만년설의 남부까지 내려간다.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 아르헨티나에는 사계절이 공존한다. 얼어붙었던 경제도 봄날씨처럼 따듯하게 해빙하고 있다. 2001년 외환위기 이래 곤두박질 치던 경제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살아나고 있다. 2002년 마이너스 11%였던 성장률은 2003년 플러스 11%로 반전했다. 2002년 200만명에 다가서던 실업자는 2003년 160만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의 잃어버린 시절을 되돌리는 데는 앞으로도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된다. 1989∼99년에 집권했던 페론주의 대통령 칼로스 메넴은 정치적으로는 포퓰리즘에 의존하면서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메넴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실시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로 인해 발생한 2001년의 금융위기는 단기간에 치유하기 힘든 사회적 고통을 낳았다. 2001년 12월의 금융위기는 당시 대통령을 사임하게 할 만큼 심각하였다. 불과 1주일 동안 대통령 대행이 3명이나 바뀔 정도로 정치적으로 심대한 후유증을 낳았다. 지난 2∼3년 사이에 아르헨티나는 세계화의 모범 사례에서 세계화의 사생아로 전락하는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는 세계화의 명암과 관련, 많은 개도국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끝없는 경제 추락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었다. 1910년 세계는 제1의 세계화에 휩싸여 있었다. 오늘날의 세계화가 주로 자본의 이동을 말하는 데 비해 20세기 초의 세계화는 노동의 이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더 광범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르헨티나 경제는 천혜의 자연자원에 의존한다. 광대한 옥토를 형성하는 남부 팜파는 목축산업 발전에 더 없는 환경이다. 1913년 아르헨티나 경제는 농산물 수출 덕분에 1인당 국민소득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을 크게 따돌리고 프랑스와 독일의 국민소득과 비슷했다.
그러한 선진국 수준의 경제는 1930년 발생한 세계불황과 함께 무너졌다. 농업수출에 기반한 아르헨티나 경제는 주요 수입국이었던 유럽의 경제불황에 의해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이 나라는 수십년 동안 경제위기와 권위주의 정치 그리고 민주화의 반복을 경험하였다. 세계화의 역풍이 불기 시작한 1990년 아르헨티나는 신자유주의 모델의 '쇼걸'로 떠올랐다. '워싱턴―컨센서스'로 불리는 미국의 개도국 정책은 아르헨티나를 새로운 발전모델의 모델 케이스로 선전해왔다. 메넴은 그간 살인적으로 상승하던 인플레를 잡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했다. 취임 후 즉시 페소를 달러에 1 대 1로 연동한 극단적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임기 동안 수출중시 정책을 추진했다. 결국 IMF 정책은 2001년 외환위기로 막을 내렸다.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달러 대 페소를 1대 1로 고정시켰던 페소의 달러화 정책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메넴 정부를 끝까지 지원했던 IMF 정책도 책임이 크다.
거리는 연일 시위인파
20세기 초반 남미의 파리라고 불렸던 아르헨티나는 실업자만 아니라 중산층도 시위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중산층은 외환위기 직후 직접적 피해자였다. 은행에 예금된 자산이 인출 동결되었고 달러화가 4분의 1로 가치가 폭락한 페소화로 지급되는 이중의 손해를 입었다.
중산층이 시위하는 이유는 은행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2002년 초부터 외환위기로 실업자가 양산되고 하층의 생활기반이 무너지면서 범죄가 극성을 부렸다. 그 중에서도 인질극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그 대상은 대부분은 중산층이었다. 우리 일행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렀던 7월13일 10만명의 중산층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인질범 소탕을 요구하는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비슷한 시간 실업자들로 결성된 노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다른 곳에서 거리 시위를 벌였다. 피켓 시위대는 도심 한 복판에서 차량통행을 봉쇄하여 도심교통을 마비시켰다. 거리 시위는 월 평균 104회 정도 실시하는데 그나마 2002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은 것이다. 실업자는 메넴 정부 후반기부터 급증하는 추세로 1994년부터 이미 두 자리 실업률을 나타냈다. 2001년의 외환위기는 대량실업을 유발했다. 2000년 146만명(15%)이던 실업자 수는 불과 1년 만에 170만명 (17.4%)을 초과했다. 2002년 실업자는 다시 195만명을 넘어 20%로 육박했는데 이는 같은 해 남미 평균실업률 10.3%의 두 배에 해당한다.
외환위기로 거리에 내몰린 아르헨티나 실업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거리에 나와 연일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 실업자 연맹은 시위할 때 요구사항을 담은 피켓을 들고 있어 '피켓 시위대 (piqueteros)'로 불린다. 피켓시위대는 막강한 '재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02년 전직 대통령이자 페론당 실력자 두할데의 조기 사임을 이끈 것도 피켓시위대의 압력이었다. 최근 들어 일부 세력은 더욱 과격해졌다.
평가절하 환율… 회복 징후 보여
2003년부터 보이고 있는 회복징후는 전적으로 평가절하된 환율 때문이다. 2001년 12월 상원에서 선출된 대통령 두할데의 과도정부는 달러화를 버리고 페소화를 선언했다. 또한 사상 최대 규모인 810억 달러의 채권에 대한 지불유예를 선언했다. 메넴 정부의 달러화 정책은 물가안정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수출을 어렵게 만들고 반대로 수입을 유발하였다. 강한 페소로 인해 메넴 정부 시절 많은 제조업이 도산했다. 약한 페소는 대대적인 수출증대로 이어졌다. 달러와 페소가 1 대 1로 교환되었던 2001년까지 수출은 국민총생산 대비 11.5%에 불과하였으나 1 대 4로 내려갔던 2002년에는 약 28%로 급증했다.
아르헨티나의 수출증대에는 중국특수도 한몫하고 있다. 과열로까지 일컬어지는 중국경제가 세계 도처에서 막대한 농산품 및 원자재를 필요로 하여 남미에까지 손을 벌리고 있다. 농산물 수출증가가 만능은 아니다. 농업수출의 증대는 아르헨티나 역사가 보여주듯 경우에 따라서는 장기적 발전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1910년대 파리에 견주었던 경제력이 얼마 못 가고 무너진 것은 농산물 수출을 산업화로 연결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 연구위원
협찬:삼성전자
■"弱페소 따른 무역경쟁력 작년 11% 성장 이끌어내"/마리오 다밀 세데스 연구소 수석 연구위원
최근 활성화된 아르헨티나의 경제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세데스 연구소 (국가와 사회의 연구센터)의 마리오 다밀 수석연구위원을 만났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위치한 세데스 연구소는 역대 정부의 경제정책 수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작년 11% 성장을 이룩하는 등 활황을 보이고 있는데 무슨 요인이 경제성장을 견인하는가.
"간단히 말해 견인차는 국제무역이다. 지금 아르헨티나 경제는 수직 상승세를 타고 있다. 상승세는 2003년에 이어 2004년 현재도 이어가고 있다. 갑작스런 상승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기초로 하면, 가장 주된 요인으로 환율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메넴 정부의 까바요 경제장관이 고집하던 페소의 달러화는 모든 것을 망쳤다. 메넴 정부의 마지막 해인 1999년 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2002년까지 4년 간 계속됐다. 환율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2002년의 경제는 2001년 파탄의 결과였는데 이는 곧 반전됐다."
―환율의 평가절하는 수출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나.
"환율의 역할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으로 농산품에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환율의 효과를 가장 많이 보았다. 달러 대비 환율이 1 대 1에서 1 대 4로 평가절하됨에 따라 아르헨티나 상품의 경쟁력은 환율 만큼 상승한 셈이다. 수출의 비중은 GDP 대비 메넴 정부시절 10%대에서 현재 30% 가까이 늘었다.
―현 키르히네르 정부의 경제정책은 과거 메넴이나 두할데 정부와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첫째, 메넴정부와 같은 페론주의에 속하는 정의당에 속하지만 경제정책은 완전히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메넴정부의 까바요 경제장관은 페소의 달러화 외에 민영화 신봉론자였다면 키르히네르 정부는 두할데 과도정부가 세웠던 경제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페소화를 지지하면서 외채협상에서는 IMF와 대립하고 민영화에 대해서도 신중한 입장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