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10일 총리와의 역할 분담 방침을 밝히게 된 배경으로 과거 제왕적 대통령제와는 다른 새로운 대통령상을 정립하겠다는 의지를 거론했다. 노 대통령이 집권 1년 6개월, 직무 복귀 3개월을 목전에 두고 국정운영 방식의 틀을 바꾸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다목적 포석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여야 정쟁의 표적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쟁에 휘말리지 않아야 효율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는 법률적으로 책임총리제는 아니지만 사실상 책임총리제에 준하는 국정 운영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총리는 이원집정부제의 총리처럼 외교·안보 분야를 제외한 내치 분야에서 실질적 결정권을 갖도록 돼 있기 때문에 이번 조치로 일상적 국정 운영권을 갖게 되는 총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17대 총선 이후에 총리 권한을 대폭 강화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노 대통령이 그 동안 묵혀두었던 카드를 꺼낸 배경은 국정 운영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갈등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이 같은 갈등을 줄이기 위한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이에 따라 대통령은 장기 국가 전략 과제와 혁신 과제, 총리는 일상적 국정 운영을 맡는 것으로 업무 분담 가닥이 잡혔다. 또 어려워지는 경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총리에게 일상적 정책 결정권을 넘기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민 대변인은 "경제 문제는 장기 전략과 단기 정책 등이 복합돼 있어서 업무를 분명히 나누기 어렵지만 일상적 국정은 총리가 맡게 될 것"이라고 말해 경제 분야에서 총리의 입김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은 중장기적 측면에서 시장 개혁 기조 유지에 초점을 맞추되 총리와 경제부총리는 보다 유연하게 단기적 경제 활성화 정책을 제시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정쟁의 표적이 되는 대통령 이미지와 역할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역할 분담의 또 다른 배경으로 지적했다. 당과 내각이 일체화해서 국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거론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와 행정에 밝은 의원 출신 총리와 여당, 국회 등의 효율적 협조 체제 구축 등이 가능하다는 판단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역할 분담 방침이 형식적 선언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이 총리의 달라진 역할이 어떤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지시는 각 부처 보고서를 총리실에도 갖다 주고 총리가 전면에 나서서 일상적 국정 현안을 챙기라는 정도다. 국무회의 운영도 총리 중심으로 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앞으로 국무회의 사회는 대통령과 총리가 번갈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분담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대통령 의지가 확고해야 할 뿐 아니라 법령의 뒷받침도 있어야 한다. 또 역할 분담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을 경우 국정 운영 혼선과 각 부처의 중복 보고 부담, 책임 소재 불분명 등의 문제점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한 "국면전환 노림수"- 우 "효율적 국정운영"
한나라당은 10일 노무현 대통령이 밝힌 국무총리와의 역할분담 방침에 대해 "원칙적으론 환영한다"면서도 "역사왜곡 문제, 경제난 등 시끄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이 아닌가"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김형오 사무총장은 이날 "대통령과 총리의 관계는 대통령의 즉흥적인 말 한마디가 아니라 법적 장치를 통해 재설정돼야 한다"며 "그런데 청와대에서 제도적 보완을 논의하지도 않는다고 하니 복잡한 정치 상황에 대한 여론 환기용, 면피용 발언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이병석 원내부대표는 "우리 헌법구조 상 총리에 내각을 통할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대통령이 외교·국방 등 장기 프로젝트에 열중하겠다는 구도는 바람직하다"면서 "하지만 노 대통령의 정치행태로 봐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갖고 그런 말씀을 했는지는 의문"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임태희 대변인은 "국정은 '장기냐 단기냐'가 아니라 '시급하고 중요하냐 아니냐'로 나눠 처리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산적한 현안을 발벗고 나서서 챙기겠다는 태도가 아쉽다"고 지적했다. 배용수 수석부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그간 시시콜콜한 사안에 직접 나서서 분란을 일으킨 만큼, 이제라도 비전을 갖고 먼 미래를 보겠다는 뜻을 환영한다"며 "말로만 끝나지 말고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10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한 국무총리와의 역할분담에 대해 "효율적 국정운영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여기에는 모든 사안마다 대통령이 나서는 바람에 초래됐던 각종 마찰을 줄일 수 있게 됐다는 안도와 기대도 섞여 있는 듯했다.
김부겸 의원은 "대통령이 일상사에 대해 너무 전면에 나섬으로써 생긴 불필요한 오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민병두 의원 역시 "역량 있는 총리가 와서 대통령이 믿고 맡길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역할 분담을 함으로써 각종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힘을 안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광재 의원은 "각종 국정과제 로드맵의 입법과정이 다 끝났기 때문에 대통령이 법률의 운영을 총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국가전략과제로 눈길을 돌린 것"이라며 '국정2기 이행론'으로 설명했다. 그는 "꼼꼼한 스타일의 총리가 대통령을 잘 보좌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 곳곳에서는 당·정 교류가 한층 원활해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왔다. 이평수 수석부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우리당은 보다 긴밀한 당·정, 당·청 협의를 통해 대통령과 총리의 국가운영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 총리실 반응
총리실은 10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해찬 총리에게 '일상적 내정(內政)'을 위임하겠다고 밝히자 상당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 동안 총리실은 외형적으로는 국정 결정의 최상층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조정'의 역할에 그쳐 내부에서는'외화내빈'이라는 자괴감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리실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이 총리에 대한 '힘 실어 주기'로 받아들였다. 한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의 총리에 대한 신임을 읽을 수 있는 언급이었다"며 "앞으로 비록 어려운 일이 많아지겠지만, 총리실 위상이 제고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헌법상 이원집정부제가 아닌 만큼 '책임총리제'실행은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러나 대통령의 발언은 이에 준하는 책임 위임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총리실 직원들도 대부분 '일하는 총리실'로의 변화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한 직원은 "이미 총리실은 가깝게는 고건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시절과 과거 김대중 대통령 시절 김종필 총리 때 '책임 총리'를 뒷받침한 적이 있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이 총리의 일하는 자세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직 조직개편과 인사 등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지만, 이 총리가 직접 일선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이자 직원들 사이에서도 '신뢰감'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이 총리가 11일 신행정수도 예정지 결과를 직접 발표키로 한 결정도 '책임 지는 총리'의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고 전총리 시절과 큰 차이가 없다며'구두선'에 그칠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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