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편집국에서]反시장의 부메랑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편집국에서]反시장의 부메랑

입력
2004.08.10 00:00
0 0

이자벨 버나드 비숍이라는 영국의 여류여행가는 조선왕조가 망해가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대표적인 외국인이다. 그녀는 1880년대와 1890년대 한반도를 네번이나 찾았고 조선과 주변국을 소재로 한 두툼한 여행기까지 남겼다. 궁중에서 명성황후(민비)를 만난 후 "나라를 좌지우지한 적도 있지만 초췌한 모습으로 일평생 궁궐에 갇혀 지낸 비운의 왕후…" 라고 묘사한 대목은 특히 이채롭다.그녀의 여행기는 조선말의 왜곡된 사회상에 대한 기술과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누군가 돈을 벌었다거나 심지어 좀 비싼 놋그릇을 샀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관리나 그의 앞잡이들로부터 호되게 주의를 들어야 했다. 조선사람들에게는 가난이 최고의 방패막이인 것 같다. 가진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소유물은 결국 빼앗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조선에는 생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보호해주는 장치가 전혀 없다. 이 때문인지 조선 사람들은 게으르고 활력이 없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고 적기도 했다. 몰락으로 치닫던 조선말은 그의 눈에 이처럼 극단적인 반시장경제적 사회로 비쳐졌다.

100여년전 조선에 관심을 가졌던 한 서구여성의 여행기를 금과옥조로 받아들이자는 것은아니다. 그의 시각은 서구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들 일 수도 있다. 그래도 비숍이 요즘의 한국땅을 다시 찾는다면 어떤 내용으로 여행기를 채울 까는 무척 궁금하다.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라를 굴러가게 하는 체제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체제를 이끄는 주체세력들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못 가진 자를 모두 괴롭게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탈을 일삼던 조선말의 탐관오리는 지금은 눈에 별로 띄지는 않는다. 반면 '생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보호해주지 않으려는 관리와 정치인들은 부쩍 늘어나 있다. 그들의 상당수는 '진보' '분배' '평등'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고, 그 부작용은 예상보다 빠르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부동산 정책이다. 소나기식 부동산 규제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집값 폭등을 막고 위화감을 없앤다는 명분에서 비롯됐지만 그 근저에는 '집값도 균등해야 한다'는 막시즘적 이분법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물가가 오른 만큼의 부동산값 상승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책들은 수치로는 성공적이다. 그러나 너무 오른 세금이 거래를 막아 거주이전의 자유 마저 박탈하면서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 도배업자, 중개업자 같은 덜 갖고 못 가진 사람들은 무척 힘겹다. 가진 사람들은 집을 안 팔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생계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다. 혁명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진보주의와 분배주의는 결과적으로 탐관오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부자는 청산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등식도 같은 메카니즘으로 작용한다. 부자들이 주머니를 꼭 닫고 나라 밖으로 돈을 빼돌린다는 얘기는 더 이상 뉴스도 아니지만 그 부메랑은 고스란히 덜 가진 사람들에게 꽂히고 있다. 석유라도 솟아나지 않는 한 가진 자가 지갑을 열어야 돈이 밑으로 옆으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진보와 평등을 앞세운 주체세력들은 이를 부인하며 불황을 '제도화'하고 있다.

버나드 비숍이 지금 이땅을 여행한다면 그의 노트에는 이런 글귀가 담겨질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무척 운이 없다. 100년 전에는 못된 관리들에 의해, 현재는 뭘 모르는 젊은 정치인과 관리들에 의해 행복을 박탈당하고 있다. 백성들을 정말 사랑한다면 결과의 평등 보다는 기회의 평등을 소리높여야 할텐데…."

/김동영 사회2부장 dy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