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정치권이 정략적인 국가정체성 논쟁을 벌이는 동안 많은 국민들이 무더위와 정치권의 정쟁으로 생겨난 짜증을 달래기 위해 피서를 떠나고 있었다. 이 때 한 부부가 인천국제공항을 떠났다. 이들은 피서객이 아니고 지난 해 가을 온 나라를 그토록 시끄럽게 했던 송두율 교수 부부였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송 교수에 대해 2심 재판부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여부 등 그 동안 공안당국과 수구언론들이 마녀사냥을 했던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데다가 혐의를 인정한 사안에 대해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그리고 검찰 역시 국제 여론을 고려해 송 교수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 교수는 가을 학기 강의를 위해 독일로 출국한 것이다.
송 교수의 출국을 지켜보면서 역시 하루 중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며, 역사란 직선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된다.
송 교수가 민주화기념사업회 초청으로 38년 만에 귀국해 일종의 통과의례로 간단히 받기로 했던 국가정보원 조사에서 그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충격적인 사실들이 연일 터져 나오면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져야 했다. 그의 학술 활동을 지지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싸워 왔던 진보진영은 송 교수의 혐의들이 그 동안 어렵게 쌓아 놓은 진보진영의 도덕성에 먹칠을 했을 뿐 아니라 다 죽어가던 국가보안법을 다시 살려주게 됐다고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특히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 가입원서를 쓰는 등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으면 스스로 알아서 귀국을 말 것이지 쓸 데 없이 귀국해 공안당국을 도와 주는 '이적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분강개했다.
반면에 탈냉전과 남북관계 개선 등에 따라 존립근거가 흔들려 노심초사하던 공안당국과 수구언론들은 소위 '건국 이래 최고위급 간첩 사건'인 송 교수 사건으로 국민여론을 반전시키고 죽어가던 국가보안법과 공안논리를 되살릴 수 있는 호기가 왔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연일 수사 결과 발표 등을 통한 충격적인 마녀사냥과 인격살인이 계속됐다. 그 결과, 여론은 송 교수와 진보진영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상황은 진보진영이 우려하는 사태, 그리고 수구세력이 바라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엄청난 광풍이 몰아친 지 11개 월이 지난 현재, 상황은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충격에 빠져 있는 것은 진보진영이 아니라 오히려 공안당국과 수구세력이다. 특히 2심 판결 이후 공안당국에서는 "차라리 김정일을 증언대에 세우라"는 격한 목소리도 나왔으나 대부분 충격 속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 것으로 언론은 전하고 있다.
반면에 다양한 민중운동 및 시민운동단체들은 이번만은 국가보안법을 끝장내겠다며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를 10일 재발족시켜 활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국회에서도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의 개혁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이번 정기국회 중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가 "내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는 한 국보법 폐지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박 대표조차도 "불고지죄 등 몇 군데는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등 수세에 놓여 있는 것은 폐지론이 아니라 폐지반대론이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개정으로 끝나고 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낡은 냉전과 공안 논리,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죽어가고 있으며, 송두율 사건이라는 지난 가을의 광기는 결국 죽어가는 공룡의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송 교수의 출국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역사를 생각해 보게 된다.
손호철/서강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