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의 필요성에 대해선 정부만 빼면,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다. 여야와 민간연구기관, 해외언론까지도 한국경제의 침체탈출을 위해선 재정의 역할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그러나 재정정책의 방법론으로 들어가면 처방은 첨예하게 엇갈린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돈을 더 씀으로써 경기를 살리자는 주장(지출확대론)인 반면 야당과 민간연구소 쪽에선 세금을 덜 걷어 소비·투자를 촉진시키자는 입장(감세론)을 개진하고 있다. 감세가 공급경제론에 기초한 미국식 레이거노믹스와 맥을 같이한다면, 지출확대론은 유효수요창출을 위한 케인즈경제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마침 정부의 내년 예산편성이 마무리되고 국회 예산심의가 시작될 시점이라, 감세와 지출확대 논란은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감세론/덜 걷자 "세금을 깎아라"
세금을 덜 걷으면 그만큼 가처분소득이 늘어 개인은 소비, 기업은 투자여력이 생긴다. 감세로 일시적 재정악화가 발생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재정구조는 상대적으로 건전한 만큼, 균형재정에 지나치게 얽매일 까닭은 없다는 요지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9일 금리인하가 힘든 상황에서 경기부양은 정부(재정)가 맡아야 하며, 재정 여건상 한국 정부는 그럴 능력도 있다고 지적했다. FT는 균형재정에 집착하는 한국정부의 보수적 재정정책에 대해 "상황이 좋을 때는 정당화되지만 현재 같은 경제상태에서는 좀 더 상상력이 필요하다"며 공격적 소득세인하와 대규모 공공지출프로그램을 주문했다. FT는 투자기관인 UBS의 경우 한국에 5% 재정적자까지 권했다고 전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의 감세정책 성공사례를 들어 '한국판 레이거노믹스'를 주장하고 나섰다. 삼성연구소 관계자는 "지금처럼 소비여력이 축소된 상황에선 가처분소득을 실질적으로 늘려주는 감세보다 효과적인 경기부양수단은 없다"며 "세수감소는 불필요한 경기지출축소와 경기상승후 세율조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재정지출확대정책에 대해선 "예산증가분을 반드시 적기에 적재적소에 써야 효과가 발생하는데 실제 적절한 사용처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감세론에 동참했다. 이날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감세를 통한 친기업환경 조성 및 민간소비활성화 유도를 주장했으며, 최경환 제4 정조위원장은 유가충격흡수를 위해 유류관련세금을 한시적으로 인하할 것을 제안했다.
■지출확대론/"정부 돈 풀어라" 더 쓰자
민간부문이 돈(소비·투자)을 쓰지 않는 만큼, 정부가 직접 돈을 쓰자는 것이 기본 골자다. 정부가 적자재정을 감수해서라도 지출을 늘려 유효수요를 만들어야 하며, 경기가 회복되면 세수의 자연증가로 재정부족도 메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재정지출 확대를 공식 주장하고 나섰다. 홍재형 정책위의장은 내년 예산편성방향 관련, "행정부 입장은 경기중립적이지만 당에서는 경기부양적 관점에서 좀 더 적극적인 재정정책(재정지출 확대)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홍 의장은 이어 "내년 예산을 얼마나 늘릴지, 적자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에 대해선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해 적자재정편성 가능성도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야당과 민간연구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감세론에 대해선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하는 쪽에선 감세론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우리나라 봉급생활자의 40%가 세금을 한푼도 안내기 때문에 감세는 별다른 효과를 내기 어렵다"며 "재정정책을 쓴다면 정부가 사업발주자가 되어 민간에 직접 현찰을 지불하는 지출정책이 더 즉각적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어디에 돈을 쓸 것이냐는 점. 일부에선 1930년대 미국의 후버댐 건설로 상징되는 '뉴딜정책'을 제시하고 있고 정부 내에서도 '행정수도건설을 한국판 뉴딜정책으로 삼자'는 주장이 있지만, 이 같은 중장기 초대형 프로젝트 보다는 일자리 창출에 지출확대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정부 "현재론 어떠한 계획도 없다"
경기부양을 전제로 한 정부 역할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대해 정부는 현 상황에서 1차 추경 이외의 또 다른 총수요 확대 정책은 없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에서 경기활성화를 위한 상호 대체재로 재정확대와 감세를 거론하지만, 2005년 예산편성과 세제개편 일정 등을 감안하면 내년에나 가능한 일이며 올해에는 추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재정경제부는 그러나 100% 가정을 전제로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면, 감세보다는 재정확대를 선호한다는 입장이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정책 브리핑에서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전반적 감세정책에는 무리가 있으며, 오히려 소득세 등의 포괄적인 세율인하는 세수감소로 재정만 악화시킬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이는 재정확대가 감세보다 정책 효과면에서 우월하다는 나름의 오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거 불황기 때마다 재경부는 감세보다 재정확대에 의존해 총수요를 자극했는데, 정책 집행의 탄력성과 효율성은 물론이고 효과의 즉시성(卽時性) 측면에서 감세보다 재정정책이 앞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경부가 재정정책을 선호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돈을 풀어 즉각적으로 진작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소득세나 법인세의 전반적 인하는 최소 6개월 가량이 흘러 국민들이 미리 낸 세금을 돌려 받는 단계에서나 효과가 나타나므로, 하루라도 경기를 빨리 회복시키고 싶은 당국자들에게는 매력적이지 못하다. 요컨대 당장 환자(경제)를 회복시키기를 원하는 의사(재경부) 입장에서는 약발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처방을 원하는 것이다.
재경부는 또 감세정책의 실패 가능성과 후유증이 재정정책보다 크다는 입장이다. 유력한 감세정책 방안으로 거론되는 부가가치세 1%포인트 인하와 관련, 재경부 이종규 세제실장은 "현재 물건 값의 10%인 부가세를 9%로 낮추면 약 6조원의 세수감소가 예상되지만, 물가만 올리고 소비는 진작시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부가세를 내리면 1만원(원가 9,100원, 부가세 900원) 짜리 상품이 9,910원으로 하락하지만, 거래 편의상 곧 1만원으로 가격이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재경부는 또 개인이나 법인 전체를 상대로 포괄적으로 세금을 인하하는 감세와 특정 대상에 대해 세금을 깎아주는 조세지원 정책은 구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감세정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투자세액 공제나 창업, 고용 지원 등 특정분야에 대한 세금감면도 않겠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선택과 집중에 의한 조세지원은 재정확대의 한 수단이며 이는 감세보다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