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내수침체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개인재산의 해외유출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재경부 발표에 따르면 올 5월까지 해외여행, 유학경비, 이민 등으로 80억7,000만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는 10조원에 달하는 규모로 전년에 비해 15%가량 증가한 것이다. 합법적 송금액 외에 불법 외화유출까지 감안하면 그 규모는 훨씬 커질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적발된 불법 외환거래액은 상반기에만 1조 3,000억 원으로 지난해의 4.8배에 달하고 이 중 재산도피를 위해 이용되는 '환치기'가 8,260억원을 차지해 지난해에 비해 9.8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자본유출 현상은 급격히 심화되는 추세이다.해외로 빠져나간 국내 자산은 미국 홍콩 중국 베트남 등으로 몰리면서 미국에서는 LA 등 교포거주지역의 부동산값이 크게 오르고 학군이 좋다고 알려진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한국 유학생들끼리 치열한 입학경쟁을 벌이고 있다. 홍콩의 금융기관에는 해외투자를 가장해 거액을 예치하거나 제3국으로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중간기착지로 이용하려는 자금이 몰리고 있다. 자본유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해외 어학연수와 배낭여행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일반화되었고 취업 등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국가 간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견문을 넓히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해외 어학연수와 유학, 여행 등은 인적자본의 질을 높인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 하다. 그러나 현재의 해외 자본유출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용되는 '투자'가 아니라 한국을 떠나려는 '도피성 자산'의 성격이 짙다. 국내 저금리를 피해 높은 수익률을 찾아 해외로 유출되는 것도 이유겠지만 국내 상황에 대한 비관으로 한국을 떠나려는 것이 더 큰 이유라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해외의 불안요인과 뿌리 깊은 노사갈등, 지속되는 내수침체 등으로 국내 경기상황은 비관적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행정수도이전 공방, 정치적 대립 등으로 오히려 불안요인을 가중시키고 있다. 사회 전반의 반(反)기업적 정서, 정부의 지나친 규제, 부자에 대한 적개심 등은 사유재산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원리마저 제한하고 있다. 또한 낙후된 교육시스템에 대한 불신까지 가세하여 한국을 떠나려는 움직임이 급증하고 있다.
국내 상황에 대한 비관론은 산업 전체에 팽배해 있다. 이미 많은 중소기업들이 고임금과 기업하기 어려운 여건 등을 이유로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지난 한 해에만 국내 제조업의 26.1%가 생산거점을 해외로 이전하였고 47.7%는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 경영여건이 개선되더라도 해외이전을 추진하겠다는 기업이 86.8%나 되어 국내 상황에 대한 불신은 기업에서 더 뿌리 깊은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성의 증가로 해외자본의 국내 투자가 줄고 삼성전자와 같이 흑자를 내고 있는 국내 기업들의 외국인 지분은 50∼60%에 달하여 매년 40∼50억 달러씩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제조업 공동화와 자본유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내수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러한 비관이 확산되고 일반화되었을 때 국가발전에 걸림돌이 될 비가시적인 요소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한국을 떠나려는 움직임은 소수의 기업이나 일부 부유층만의 현상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느끼고 있는 보편적 불신과 회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민족정체성과 혈연에 대한 애착이 강한 우리 국민들이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표상인 대한민국을 떠나려고 하고 있다. 부디 현 정권은 지금까지의 정치적인 대립과 반목을 끝내고 시장경제 원리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여건을 만들어 국민이 모국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조하현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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