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은 책임을 수반한다. 어느 직위에서 그 책임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는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영국 BBC 경영위원장과 대표이사가 동시에 사임한 올 1월의 상황이 정확히 그러했다.장관들까지 수시로 바뀌는 우리나라에서 보면 별 일도 아니겠지만, 세계 최대의 뉴스조직 BBC의 두 수장이 한꺼번에 중도하차 하는 경우란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오죽하면 BBC 역사상 최대 위기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BBC가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든 것은 바로 이라크전 정보문건 파동에 대한 ‘허튼보고서’였다. BBC의 길리건 기자가 지난해 “정보문건이 고위층에 의해 자극적으로 각색되었다”고 보도하면서 파문이 일었고, 급기야 해당 보도의 유일한 정보원이었던, 정부 내 무기사찰전문가 켈리 박사가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
이 복잡한 사건은 꼬장꼬장한 퇴임판사 허튼 경의 손에 맡겨졌다. 한 손에는 블레어 정부의 명운을, 또 한 손에는 BBC의 자존심을 쥔 그는 마침내 올 초, 한 쪽에는 면죄부를 주고 다른 한 쪽은 목을 비틀어버리는 보고서를 냈다.
다이크 사장이 물러나던 날 BBC 직원들은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으며, 다수의 국민들은 “그래도 정부보다는 BBC가 더 믿을만하다”며 입을 모았다.
혹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이라면 그 뒤의 일들을 보며 실망했을 것이다. 그 보고서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지적하면서도 그들은 자리에서 물러났고, 명예회복의 최선책은 ‘책임지는 자세와 개혁’이라고 믿은 BBC는 자체조사에 기반한 수술을 감행했다. 데이비스 전임 경영위원장의 말처럼 “심판의 판정이 최종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길러진” 사람들의 사회인 셈이다.
재미난 것은, 하나의 판정은 그것을 곧바로 뒤집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다른 심판의 또 다른 판정을 통해 보완될 수 있다는 신념체계와 마주하는 일이다.
지난 7월 중순에 발표된 ‘버틀러보고서’가 그것이다. 허튼 경이 BBC 보도의 ‘근거’를 추궁하는 것에 진력했다면, 버틀러 경은 정부 정보문건의 ‘진실성’을 파헤치는 데 집중했다. 의도적인 왜곡은 아니었지만, “근거 박약한 정보문건을 정책적으로 활용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판결은 목까지 자르지는 않을 목적으로, 그럼에도 뼈아프게 내려쳐진 칼등이었다.
허튼보고서 발간 직후 “총리도 옳았고, 나도 옳았고, 그들은 틀렸음이 입증되었다”며 의기양양했던 정부측은 이 보고서 발간으로 흙 씹은 표정이 됐다. 그리고 다음날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반전(反戰)을 내건 자유민주당이 승자가 됐다.
시스템은 지나치게 요동하지 않고, 심판의 판정들이 중첩되어 스스로를 교정해 가며, 국민은 표로 판결했다. 과연 영국다운 보수(補修)주의다.
남은 것은 블레어 총리의 몫인데, 정치권력의 최정점인 만큼 BBC와 똑같은 방식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심판의 칼도 그의 목을 직접 겨눈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 역사상 최장 총리라는 정치적 야심이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라도 모종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그리고 어찌됐든 BBC의 저널리즘은 다시 권력의 핵심을 향해 파고들 것이다. 지난번과 같은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이번엔 더 촘촘하게 말이다.
/정준희ㆍ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박사과정(커뮤니케이션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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