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를 고공 행진으로 몰아가는 러시아 유코스 사태는 러시아 자본의 해외 유출을 촉발시키는 등 자국 경제에도 '신뢰의 위기' 라는 깊은 내상을 입히고 있다.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 "올해 러시아의 순 자본 유출이 80억∼85억 달러로 급증할 수 있으며, 자본 유출이 2, 3년 안에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게르만 그레프 러시아 경제장관을 인용, 보도했다. 이는 러시아 중앙은행의 올 예상수치 65억 달러를 훨씬 넘는 것으로 지난해 자본 유출액(29억 달러)의 세 배에 가깝다.
고유가로 경제 호황을 구가하는 러시아에서 자본 유출이 급증한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하지만 유코스 사태의 이면을 들춰보면 쉽게 이해된다.
당초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전 회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치적 갈등이 생겼을 때 정부가 회사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유코스의 자구안을 모두 물리치고, 유코스의 알짜배기 자회사가 푸틴의 측근이 대표인 친정부 기업에 팔릴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가 악화하기 시작했다. 푸틴 정부가 핵심 전략 산업과 자금줄을 틀어 쥐는 '국가 자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유코스 사태 외에도 구 소련 정보당국이나 군 출신으로 '실로비키'(siloviki·제복을 입은 남자들이란 뜻)로 불리는 푸틴의 측근들이 주요 기업의 대표가 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FT는 4일자 기사에서 국가의 경제 주도권을 뜻하는 레닌의 '커맨딩 하이츠'(The Commanding Heights)라는 용어를 써가며 "일련의 사태는 '정부가 경제를 지배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장 경제 개혁의 가늠자로 불리던 천연가스 회사 가즈프롬 분할 계획은 푸틴 집권2기 들어 엉뚱하게도 정부 지분을 38%에서 51%로 늘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됐다. 금융을 장악하고 있는 국영은행들도 아직 개혁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 이는 자본의 흐름을 정부가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필립 풀 홍콩상하이은행 신흥시장연구원은 "자본 유출은 유코스 사태의 직접적 결과"라며 "앞으로 러시아 기업들이 더 많은 돈을 해외로 돌릴 것으로 보여 러시아 내 투자는 감소하고 경제성장률은 낮아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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