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논란이 잠잠해진 듯하다. 위기가 아니었거나 위기가 물러갔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의 신념에 찬 경제위기 거부감으로 위기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있을 뿐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위기라는 말만 빠져 있을 뿐 경제단체나 연구소가 내놓는 보고서는 우울한 통계와 비관적 전망 일색이다.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진 구석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위기라는 말을 안 쓴다고 위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각료들이 전하는 간접화법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우리 경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경제위기론에 대한 대통령의 심한 거부감 때문에 위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지만 비유법과 간접화법을 동원한 메시지는 분명 다급한 SOS를 타전하고 있다.
우리 경제를 두고 '고치기 어려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진 환자'(이헌재 부총리겸 재정경제부장관)나 '조로(早老)현상에 따른 산성화한 체질'(박승 한은총재) 등으로 비유한 것은 최상급의 위기감을 담고 있다. 더 이상 우리 경제의 위기상황을 대변해주는 표현이 따로 있겠는가.
10여년간 불황의 터널에 갇혀있던 일본이 장기불황 탈출을 공식 선언했다. 탄탄한 국제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이 회복되고 설비투자가 늘어나면서 내수에 불이 붙더니 중소기업에까지 훈풍이 돌아 전체 경제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웃의 장기불황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여유를 부리던 우리나라는 어떤가. 재계와 경제연구소, 언론들의 줄기찬 위기 경고에도 청와대와 정부는 '괜찮다' '결코 위기가 아니다'는 말만 되풀이 하더니 정작 실상이 드러나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반기부터 회복될 것이라던 낙관론은 간데 없고 성장률 물가 투자 일자리 등 곳곳에 경고등이 켜지자 경제체질을 들먹일 뿐 손을 못쓰고 있다.
이런 판에 일본식 불황의 내습 여부를 놓고 벌이는 논란은 부질없다. 민간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보고서는 중소기업의 낮은 수익률, 기업투자의 전반적 위축, 소비 부진, 산업공동화 심화 등은 일본의 장기불황 진입 때와 비슷하지만 일본의 부동산거품 붕괴에 따른 극심한 금융경색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분석했다.
또 일본은 금융·실물의 복합불황으로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에 빠졌으나 우리나라는 이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분석을 토대로 우리나라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과 상황이 다르다고 우리나라가 장기불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정말 황당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신용불량자 양산, 대규모 실업사태, 투자 부진, 기업의 해외탈출, 소비 위축, 고물가, 강성 노조 등 온갖 악재들이 겹쳐 있다. 유일한 버팀목이던 수출도 급랭기류를 보이고 있다. 일본식 불황은 물론 자칫 하면 남미경제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경고를 호들갑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차라리 우리나라가 불황의 터널 속에라도 있다면 다행이겠다"는 한 중소기업인의 토로는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대변해준다. 터널 속이라면 좀더 참고 견디면 터널을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가질 텐데 지금은 그런 희망마저 없다는 것이다.
선장이라고 있긴 한데, 나침반을 잃어버리고 천기도 읽을 줄 몰라 칠흑의 바다를 헤매는 난파선이 바로 지금의 한국경제의 모습이다. 등 뒤에서는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 등 미래의 경제 공룡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데 언제까지 과거만 뒤지고 정쟁에 매달려 있을 것인가. 불확실 불투명 불안이 기업할 의욕을 꺾고 경제를 골병 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방민준 논설위원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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