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마지막 열기를 뿜어대는 8월 초 어느 저녁의 홍대 입구 역. 친구를 만나러 나선 울긋불긋한 염색 머리의 청춘 남녀부터 하루치 피로를 어깨에 그대로 짊어진듯한 양복 차림의 직장인까지, 저마다 분주하게 오갑니다.서로 알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지만 모두들 역 앞의 한 커피전문점 앞 보도블록에서 잠시 멈춥니다.
불과 5분 전 평범한 거리에 불과했던 이 곳이 어느새 미니 공연장으로 변했습니다. 책가방을 맨 교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소리칩니다. “와! 거리 공연이다!” 그러더니 저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들고 ‘몸 풀 준비’를 합니다.
오늘 무대의 주인공은 로큰롤 밴드 ‘오! 브라더스’. 복고풍으로 차려 입은 모양새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흥겨운 로큰롤 리듬이 울리자 몇몇 열성적인 젊은이들은 뒤질세라 앞줄에서 온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클럽에서처럼 팔짱 끼고 서있다고 ‘외계인’ 취급 받는 것도 아닙니다.
싫으면 그냥 지나가면 되고, 휴대폰이 울리면 받으면 되고, 친구와 잡담을 나누도 되고, 음악을 배경음악 삼아 신나는 춤판을 벌여도 되고, 그 무엇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자유로운 거리 풍경입니다.
공연 시간은 단 30분. 아쉽지만 주변 상인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합니다. 계획 없이 모였던 ‘준비 안된 관객’이지만 이 곳에 함께 머물던 사람들은 목마른 오후, 자판기에서 시원한 청량음료를 뽑아 마신 어린이마냥 에너지가 100% 충전된 표정으로 제 갈길을 갑니다.
유럽의 어두컴컴한 지하철 역과 비둘기 가득한 노천 카페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됐던 거리 공연 풍경.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 거리에도 즐거운 음악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국악부터 정통 발레, 마임, 연극, 록, 재즈 등 장르의 제한 없이 우리 거리를 예쁘게 색칠하는 다양한 공연들은 삭막한 회색의 도시 풍경에 상큼한 액센트를 더해줍니다.
거리 공연을 즐기는 비법은 따로 없습니다. 길가다 맘에 드는 음악이 흘러 나오거든 귀를 잠시 열고 마음껏 즐기세요. 지루한 음악회에서처럼 맘에 안 드는 공연을 졸면서 참을 필요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소통과 나눔의 공간인 길, 그 곳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문화의 향연으로 초대합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물고기자리'로 뜨는 가수 이안
“비틀즈의 고향 영국 리버풀에서 우리의 전통악기로 거리 공연을 펼칠 때 기분은 정말 짜릿했어요. 가끔은 경찰을 피해 악기를 들고 뛰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7개월 동안의 거리공연 기억은 두고두고 제 삶에 힘이 될 것입니다.”
최근 ‘물고기자리’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가수 이안(24)은 월드컵을 앞둔 2002년 1월부터 7월까지 장구를 메고 세계를 누비며 국악을 전한 거리공연의 대가(大家)다.
당시 서울대 국악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씨는 같은 과 동기인 박영주, 차승민씨와 함께 장기 공연 여행을 결심한다.
“국악 중ㆍ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사람들이 국악을 낮게 취급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어요. 심지어 가야금을 들고 다니면 ‘커서 기생 될 거냐’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국악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고 다짐했는데 국내보다는 거리공연 문화가 발달한 해외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3년 동안 식당 보조, 공연 출연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아 결국 길에 나섰습니다.”
세 명의 당찬 여대생들이 국악의 울림을 전한 곳은 약 25개국. 태국, 캄보디아, 네팔 같은 동남아 국가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까지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 보니 7개월이 뚝딱 흘렀다.
파리에서 만난 프랑스인 신혼부부에게 전통 축가인 ‘가시버시 사랑’을 불러줬던 일, 체코 프라하 ‘카를교’ 위에서 공연을 하다 경찰에게 쫓겨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던 아픔, 인도에서 국악 연주를 듣고 ‘크리슈나 찬가’로 답가를 해주던 현지 거리 악단 등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예술의 도시’에 사는 이들답게 거리 공연을 보고 감동이나 즐거움을 얻으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파리지앙(Parisienneㆍ파리 사람)’들. 공연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자리를 뜨지 않던 이들이 한 신사가 벗어놓은 모자에 너도나도 작은 정성의 표시를 한 후에야 편안한 표정으로 흩어졌던 장면도 기억에서 지우기 어렵다.
“지금은 국내 활동 때문에 거리 연주를 쉬고 있지만 기회가 되면 다시 장구를 메고 어느 길에든 서고 싶어요. 전 세계 거리 악사가 모여 5일 밤낮 음악을 나눈다는 인도의 한 축제에도 언젠가는 꼭 갈 거예요. 음악 수준이 높지 않아도 표정과 몸짓으로 예술을 나눌 수 있는 즐거운 공간이 바로 거리거든요.”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안데스에서 온 '잉카 엠파이어'
지하철 역사와 인사동, 대학로와 광화문 지하차도 등 거리 공연의 명소에 언제인가부터 생소한 악기를 든 외국인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렇고 그런 지루한 일상에 지친 발걸음을 끌고 집으로, 술집으로 향하던 행인들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잠시 눈길을 주다가 마음을 울리는 멜로디와 리듬에 오래도록 멈춰 선다.
남미 음악을 전하러 한국에 왔다는 이들은 안데스 산맥의 전통 악기를 들고 밤낮 없이 한국의 눅눅한 거리를 흔드는 거리 악사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남미 음악 공연 팀은 ‘잉카 엠파이어’, ‘시사이’, ‘뉴깐치냔’ 등 세 개. 2001년 5월부터 한국에서 활동했다는 ‘잉카 엠피아어’의 리더 올란도(31)씨는 에콰도르 출신으로 한국어, 독어, 스페인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서울 지하철 이수역에서 만난 그의 말.
“한국에 오기 전 유럽에서 8년 동안 거리 공연을 했습니다. 1999년 청주 비엔날레에 참석했다 만난 페루 출신 하비에르, 라파엘과 함께 한국이 좋아 2001년 의기투합했습니다.
즐거운 리듬 속에 어딘지 모르게 구슬픈 감성이 숨어있는 남미 음악이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는지 유럽인들보다 한국인들의 반응이 훨씬 열광적이에요.”
20개가 넘는 피리를 연주한다는 올란도씨와 전통기타 ‘자랑고’를 연주하는 하비에르, 노래를 담당하는 라파엘씨는 하루에 한 번 꼴로 거리 공연을 한다. 장소는 서울과 수도권의 지하철역에서 부산의 해변가, 대구의 번화가 등 제한이 없다.
올란도씨는 ‘슬픈 인디오’라는 곡을 연주할 때면 사람들이 자주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거리 공연의 현장에는 ‘제대로 된’ 공연장이 줄 수 없는 또 다른 교감이 오간다고 강조한다.
‘거리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유럽에서만 두 장,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한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거리 공연을 보고 돈을 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풍경. 음반 판매 수익금과 각종 이벤트 초청 공연에서 받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정식 공연장의 관중석은 저희에게 너무 멀어요.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찾아와 악수를 청하고 악기에 관해 질문을 쏟아내는 거리가 저는 훨씬 정겹게 느껴집니다.
악보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느낌만으로 연주하는 안데스 음악과 무대 없이 관객과 하나가 되는 열린 공간은 서로 닮아 잘 어우러지지요.”
/김신영기자
■길위의 문화 오아시스
유럽의 노천 카페에 특유의 낭만을 더하는 것은 아코디언과 하모니카로 무장한 거리의 악사들이다.
여자 친구에게 연주를 선물하거나 함께 사진이라도 찍을라 치면 으레 돈을 요구하는 그들이지만 그 정도 대가쯤은 기꺼이 치러도 좋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거리 공연은 즐겁고 낭만적이다.
어쩐지 허전하게만 느껴졌던 우리나라의 거리에도 언제부터인가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나 지하철 예술무대 등 준비된 야외 공연장이 중심이 됐지만 관중과의 벽 없는 소통에 매력을 느낀 음악가들은 보도블록 위로, 한강 둔치로, 동네 놀이터로 영역을 확장해가며 활동 중이다. 거리와 공연, 그리고 관객. 이 3박자의 어울림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보자.
● 문화의 사각지대에 울리는 문화 향기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메카 홍대에도 사각지대는 있다. 뜨거운 젊음의 열기가 있는 클럽에서 한바탕 흔들고 난 후 감미로운 재즈를 감상하며 시원한 맥주 한잔 하러 옮기는 찰나, 황량하고 조용한 거리가 돌연 김을 뺀다.
로큰롤 밴드 ‘오브라더스’는 이런 거리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한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라는 특성상 방송국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일정을 잡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거리를 잠시 빌려 팬들을 만난다.
밴드 리더 이성문씨는 거리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문화 공간 사이를 이어주는 거리를 점령해서 놀아보자”고 소리친다.
“1999년 여름부터 거리를 무대 삼아 공연을 했어요. ‘장사에 방해된다’는 주변 상인들의 불만 때문에 공연은 대부분 30분 정도의 ‘미니 콘서트’로 끝나지만 편안한 팬들을 만날 수 있기에 거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공연하기 4시간 전 쯤 인터넷 동호회에 일정을 올리고 ‘게릴라성’으로 진행하는데 이제는 거리 공연을 일부러 찾아서 오는 팬들도 있어요. 사실 허전한 거리를 멋진 공연이 채워준다면,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닌가요.”
● "무대 공포증 따위는 없어요"
10여명의 국악 전공 대학생들과 일주일에 한두번 거리공연을 하는 국악 실내악단 ‘길굿 솔로이스츠’ 단원 박인혜씨의 거리 공연은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다.
박씨는 “취객이 뛰어 올라오고 주변 상인들이 항의하고 가끔은 관객 한명 없어 서운하기도 하지만 거리에서 계속 공연하다 보면 무대 위 대처 능력 만큼은 대단히 발달한다”며 “나중에 어떤 활동을 하든 거리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술 취한 이들이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공연을 방해하고 생음악이 마냥 신기하기만 한 어린 아이가 무대 사이사이를 누비며 소리를 질러대는 곳.
“노래 한번만 하게 해달라”며 갑자기 트롯 반주를 신청하는 할아버지, 갑자기 썰물처럼 관객이 자리를 떠 연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 민망한 상황 등등, 거리공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쯤 되면 음악회장에서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 정도는 애교 수준.
지하철 공연을 주관ㆍ운영하는 ‘레일아트’ 박종호 대표는 “이른바 ‘제도권’ 무대 공연자들이 신비감을 준다면, 격의 없는 거리 공연은 연주하는 이와 관객 모두에게 자유를 준다”며 “언제든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정제되지 않은 관객의 발걸음을 잡아 놓을 때 공연자가 느끼는 뿌듯함은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
● 소외된 국악 대중화의 반가운 대안
거리 무대에서 가장 빛을 발하며 발전하는 장르는 단연 국악이다. 우리 전통 음악이면서 어느새 서양 클래식과 가요에 밀려 변방의 음악으로 홀대받았던 국악이 거리로 당당하게 ‘컴백’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거리에서 피리 공연을 해왔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국악원 김태경(20)씨는 공연 팀 ‘뜨락’과 함께 지하철역과 인천공항 등을 돌며 국악을 알린다.
“공연장을 빌려 연주를 하면 결국 소수의 관심있는 분들만 모이게 됩니다. 거리 공연의 가장 큰 힘은 몰라서 국악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국악의 향기를 처음 접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죠.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이 마음에 들어 ‘거리 관객’에서 애호가로, 애호가에서 마니아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아요. 자녀의 손을 잡고 와서 피리를 가르치고 싶다며 상담하는 아주머니들도 보람을 느끼게 하지요.”
조용히 봐야 하는 서양 클래식 공연과 달리 국악은 추임새를 넣어가며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호흡해야 ‘제맛’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거리만큼 좋은 무대는 없다.
‘길굿’ 멤버 박인혜씨도 ‘준비되지 않은 국악 청중’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저는 거리공연을 하면서 이대로 사라지는 줄 알았던 국악이 다시 우리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공연을 본 분들이 저희를 찾아와 악기를 가리키며 ‘이게 뭐냐’며 물어올 때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죠. 국악에 대한 거부감과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우연히 ‘길 가다’ 접하게 된 우리소리는 교실이나 공연장에서보다 훨씬 크게 마음을 울리나 봅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박종호 '레일아트' 대표의 편지
에어컨이 설치된 지금은 지하철역이 동네 사랑방이자 피서지로 꼽힌다. 그러나 약 4년 전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여름에 사당역에서 연신 땀을 훔치며 2~3시간을 진행자로, 공연자로, 연출자로 서다 집으로 가는 길은 늘 무언가 허전했다.
고음처리가 더 좋았으면 하는 후회도 아니고, 취객이 뛰어들 때 좀 더 의연히 대처할 걸, 하는 자성도 아닌 그 허전한 느낌의 진짜 원인은 가장 정직한 데에 있었다.
출연하기로 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다 보면 어느새 공연시간이 다가와 낑낑대며 허겁지겁 장비를 설치하고,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다음 공연자를 위한 ‘대타’ 공연으로 허덕이던 날들…. 점심은커녕 아침도 구경을 못한 위장의 공복감이 허전함의 원인이었고 돌아보면 한 주에 한번 진행하는 공연이 너무나 버거웠던 날들이었다.
2000년 초 통기타 하나를 들고 이처럼 어렵게 시작한 지하철 공연예술 ‘레일아트’는 4년만에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전문예술법인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수도권 광역철도와 고속철도를 비롯해 새로 만들어진 광주지하철, 김포 및 인천공항 등 매월 평균 150~200여 장소에서 동시에 공연이 열린다.
1999년, 영국 런던에 머무는 친구를 찾아 여행을 갔다가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에 반해 서울로 돌아가면 반드시 거리 공연을 추진하겠다고 결심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연을 할 대중적인 공간을 찾다 집 근처 역인 사당역에 통기타 하나를 들고 나섰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거리 음악가들에게 사당역은 예술의 뿌리이며 첫사랑 같은 존재다.
지하철 공연이 이렇게 자리잡게 된 데는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풀뿌리 연합’이 큰 공헌을 했다. 남들이 공연장에서 몇억씩 들여서 하는 공연을 밥값만 내고 치러내기 일쑤였고 공연자들 사이에는 경쟁의식 대신 끈끈한 정이 흘러 ‘OO씨’ 대신 오빠, 누나, 삼촌 같은 가족적인 호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지금 지하철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사람만 약 200명. 초등학생부터 남미에서 온 외국인까지, 거리 공연을 사랑하고 남들에게 들려줄만한 실력이 된다면 거의 제한은 없다.
공휴일에 지하철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시작되는 사당역 공연도 멈춤이 없다. 기억에 남는 팬도 많다. 몇 달째 일상 생활을 거부하고 꼬깃꼬깃해진 팸플릿을 들고 우리 공연만 찾아 다니는 30대 후반 남성은 자칭 ‘열성 마니아’지만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세상에서 그를 위로할 곳이 그리도 없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 초등학생이 휠체어를 탄 불편한 몸으로 매주 우리를 찾아 모든 이들을 나이와 상관없이 형, 누나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도 토요일 사당역의 익숙한 풍경이다.
전 KBS악단장 김인배님과 멤버들이 펼쳐놓는 관록의 연주, 브라질의 전통 무술춤 ‘까뽀에라’ 공연에서부터 지하철공연의 단골 팀인 안데스 음악가들, 일본의 한국 음악 카피 밴드 ‘곱창전골’ 리더인 샤또유끼에와 미국, 일본에서 온 자칭 ‘현대 음악가’들의 ‘엽기 생음악’ 등 어떤 음악이 펼쳐져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는 ‘귀 명창’ 관객이 있는 곳이 바로 사당역이다.
국내 1호 프리마 발레리나 김명순씨가 처음 공연을 왔을 때 ‘내 생전 이런 곳에서 공연하기는 처음이야’라고 놀라면서도 토슈즈를 신고 다리를 곧추세우던 모습 역시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문화의 레일, 관계의 레일을 깔아간다는 자긍심으로 일을 해오면서도 명분과 당위성, 열정을 다 떠나 주변의 여건이나 외적인 일로 문득 회의가 들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때마다 처음 공연을 시작할 당시 사당역 박유식 부역장의 말씀을 떠올리며 첫 마음으로 돌아가곤 한다.
“지하철은 4계절 동안 단 한번도 비가 내리지 않는 공간이라 늘 분위기가 삭막해요. 이 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어쩐지 딱딱하게만 느껴지고요. 그런데 우리 사당역은 매주 공연이 있어 바싹 마른 바닥과 사람들의 마음을 문화의 비로 촉촉이 적셔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왁자지껄 게릴라 공연들
거리 공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짜여진 틀을 벗어나 예고없이 진행되는 ‘게릴라성’이다. 늘 다니던 길 위에서 뜻밖에 접하게 되는 좋은 공연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공연자와 관객의 거리가 가깝고 분위기가 자유로운 거리공연을 보고싶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발품을 파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과 부산, 대구 등의 지하철 역은 국악 클래식 가요 같은 음악 콘서트부터 발레, 브레이크댄스, 무술 시범까지 각양각색의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지하철 예술단 ‘레일아트’에서 기획ㆍ운영하는 지하철 공연은 역을 구분하지 않고 어디에서나 열리지만 상설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역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지하철 공연의 원조 격인 사당역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약 3시간 동안 진행된다. 대구 지하철역 참사로 두 주를 쉰 것을 제외하고는 2000년 4월부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진행됐으며 공연 장르의 제한은 없다. 이수, 을지로입구 등 무대가 설치된 역에는 대부분 정기 공연이 있어 행인의 발걸음을 잡아둔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도 거리 공연이 잦은 곳이다. 5월부터 매주 일요일 ‘차 없는 거리’로 지정돼 골목 사이사이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공연이 많이 늘었다. 지역 특성 때문에 마임이나 연극의 한 부분을 선보이는 ‘맛배기용’ 거리 공연이 많다.
인사동에서는 차가 통제되는 주말에 판소리, 풍물패 공연 등 전통음악 공연이 많이 열린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전통혼례 재현 행사도 만날 수 있다.
두산타워, 밀리오레, ampm 등 대형 패션몰이 많은 동대문 일대에는 힙합이나 브레이크 댄스 등 10~20대 젊은이의 눈길을 끌기 위한 공연이나 패션쇼 등이 자주 열리며 대부분 오후 8시쯤 시작한다.
한강 둔치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진행되는 야외 공연은 여름 밤에만 느낄 수 있는 운치를 선사한다. 서울광장에서는 8월26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8시부터 2시간 동안 ‘한 여름밤 서울광장 축제’를 진행한다. 서울시향, 서울시 뮤지컬단 등 야외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대규모 공연단이 출연해 열대야를 식힌다.
/김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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