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 전면전' 발언이후 보름 넘게 여권의 정체성을 문제 삼았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조심스럽게 발을 빼고 있다. 한나라당은 5일 정체성 공세의 주체를 당으로 이동시켜 이규택 최고위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과 대한민국 정체성 수호 비상대책위'를 출범시켰다. 자연스럽게 박 대표를 공세 일선에서 비켜 세우는 수순이다.물론 전여옥 대변인은 이날 "박 대표는 대책위와 호흡을 맞춰 앞으로도 정체성 문제를 계속 따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도 "정체성은 색깔론이 아닌 국가의 기본을 지키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라고 여전히 집착을 보였다. 하지만 전날 밤까지만 해도 "경제난은 좌파정책 탓"이라며 날을 세웠던 것과 비교할 때 강도는 완연히 누그러졌다.
대책위 출범을 계기로 이제 박 대표가 공세의 전면에 나서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직자들이 박 대표에게 "여권의 맞불 공세에서 비켜있어야 한다"고 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당 지도부는 박 대표가 '나 홀로 공세'를 이끌면서 정수장학회 논란 등 여권의 조직적인 역공에 부딪쳤다고 보고 박 대표 보호에 부심해왔다. 박 대표도 그간의 공세로 얻을 것은 충분히 얻었다고 보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급진, 좌파적인 면을 부각, 보수 층을 결집한 것은 물론 강력한 야당 지도자 이미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구체적 내용 없이 정체성 시비가 되풀이되는 것에 다소 식상해 하는 여론도 영향을 미쳤다.
박 대표는 대신 의원들을 그룹별로 모두 만나는 등 당분간 집안 단속에 주력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3일 대구·경북지역 초선 의원들을 만난 데 이어 4일에는 새정치 수요모임 의원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朴때리는 이재오 왜?
한나라당 이재오(사진) 의원을 사석에서 만나면 가끔 자신의 아랫배를 드러내 보일 때가 있다.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딸 을 비판,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 갔다가 갑자기 발병한 복막염을 치료하지 못해 생긴 큰 흉터가 그의 배엔 남아있다.
"독재자의 딸"로 시작해 "박근혜 대표는 퍼스트 레이디로 유신의 한 가운데 있었다" "정수장학회를 내놔라" 등 박 대표를 향한 이 의원의 잇단 독설 릴레이를 지켜보며 당 안팎에서 품는 "왜?" 라는 의문에 대한 이 의원식 답인 셈이다. 그는 5일에도 "박 대표는 유신 독재에 향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지표현 차원에서라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그의 독설엔 개인적 감정이 바탕에 깔려있는 듯 하다. 이렇게 되면 애당초 공존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부인하지만 탈당설이 흘러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 대표의 잠재적 대권 경쟁자인 이명박 서울시장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그는 "유치한 발상"이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이 시장쪽에서 측근인 이 의원을 부추기고 있다는 설이 당 안팎을 떠돈다. 이는 '유신'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는 박 대표가 대권후보가 되면 한나라당은 또 실패한다는 '대권 불가론'과 맥이 닿아 있다.
하지만 이회창 전총재의 전례를 들어 정반대의 해석을 하는 이도 있다. 당시 이 의원이 아들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지만, 막판엔 돌아서서 누구보다 창(昌) 보호에 앞장섰다. 이 의원이 이날 "박 대표가 먼저 나서 해원상생(解怨相生)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한 것에서나, 이 의원이 '오버'로 비칠만큼 박 대표 비판에만 골몰하는 것을 보면서 "박 대표에게 돌아설 명분을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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