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동 살인사건 수사가 미궁에 빠져 장기 미제 사건이 돼 버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범행 현장의 피 묻은 담배꽁초로부터 DNA를 채취, 염기서열이 거의 일치하는 용의자를 찾아내 한때 수사가 급진전하는 듯했으나 이 용의자가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 경찰은 결국 불구속 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역전시킬 증거를 찾기 위해 경찰은 가능한 인력과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뚜렷한 성과가 없다.
지난 5월13일 새벽 2시30분께 서울 구로구 대림동 K반점 뒤 화장실에서 이 음식점 여주인인 재중동포 김모(39)씨가 괴한에게 칼로 가슴 등 4곳을 찔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김씨는 화장실 대변기에서 칼에 찔린 뒤 K반점 옆 O술집으로 들어가 "저 아저씨 미쳤나봐. 경찰에 신고 좀 해줘요"라는 말을 끝으로 쓰러졌다. 유일한 목격자인 같은 건물 2층 야식집 종업원 박모(22)씨는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 창문으로 밑을 내려다보니 키 170㎝ 가량에 보통 체격의 20∼30대 남자가 황급히 화장실에서 나와 인근 주택가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화장실 소변기 위의 깡통에서 담배꽁초 9개를 수집했고 현장에서 60여m 떨어진 차량 밑에서 범행에 사용된 부엌칼을 발견했다.
경찰 수사는 9개의 담배꽁초 중 하나에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이 담배꽁초에 묻은 타액의 주인만 확인하면 사건은 쉽게 풀릴 것 같았다. 경찰은 피해자 주변인물과 사건 당일 O술집을 출입했던 인물들의 DNA를 채취해 담배꽁초 타액의 DNA와 일치하는 정모(35·노동)씨를 긴급체포했다. 범행이 벌어진 대변기와 담배꽁초가 발견된 소변기의 거리는 50㎝ 정도에 불과하지만 대변기 문을 연 상태에선 소변기가 가려져 피가 튈 수 없고, 꽁초의 피자국이 피가 튄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손으로 만진 자국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경찰은 정씨의 범행을 확신했다.
그러나 정씨가 "그날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왜 내 담배꽁초에 피가 묻어 있는지 모르겠다"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면서 사건은 벽에 부딪쳤다. 특히 정씨는 "김씨를 알지도 못하며 사건 당일 밤 12시30분께 술집을 나와 곧바로 집으로 가 잠을 잤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대로라면 그는 사건 발생 시각에 집에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김씨를 살해한 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화장실에 떨어져 있던 담배꽁초에 고의로 피를 묻혔다고 가정할 수 있다.
물론 정씨가 실제로는 집에 가지 않고 어디선가 칼을 구해 돌아온 뒤 범행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정씨에게서 원한, 금전 관계 등의 특별한 범행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씨가 당시 3차에 걸쳐 술을 마신 것으로 밝혀져 만취상태에서 우발적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더구나 정씨의 사건 알리바이는 불분명하다. 정씨는 일 때문에 지방에 자주 내려가 부모가 사는 서울집에 들어오는 날이 불규칙하다. 이 때문에 정씨 부모는 당일 정씨의 행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정씨가 술집을 나온 12시30분부터 사건이 발생한 2시30분까지 2시간 동안의 행적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경찰은 여러 경우의 수를 두고 퍼즐을 맞춰가고 있지만 추가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해결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 수사관계자는 "대림동 살인사건은 도시적 익명성이 낳은 괴물"이라며 수북이 쌓인 사건 파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안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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