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세를 미처 느껴보기도 전에 다시 추락 양상을 보이는 경기가 장기불황의 터널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재정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세금을 깎든 지출을 늘리든 공격적 재정정책으로 침체의 장기고착화를 막자는 논의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 힘을 얻고 있다. '한국판 레이거노믹스(감세)', '한국판 뉴딜'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가능한 정책수단은 재정뿐
현실적으로 금리·환율정책은 운신 폭이 아주 협소한 상황. 유가폭등으로 경기와 물가가 악순환 고리(스태그플레이션)를 형성하면서 금리나 환율 모두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이중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금리와 환율의 경기조절기능이 사실상 무력화된 만큼,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거시정책수단은 결국 재정 뿐이다.
물론 재정도 좋은 사정은 아니다. 경기부진으로 세수는 줄고, 추경편성으로 지출은 늘어나 연간 통합재정적자는 7조원을 넘어설 전망. 멀리 통일비용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행정수도 이전, 미군기지 이전 등 앞으로 닥칠 천문학적 국책사업을 감안하면 재정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꾸려가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여력이 있는 쪽은 재정 뿐이라는 평가다. 우리나라의 GDP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3%로 평균 85%에 달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한은 고위관계자는 "효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재정정책은 경기대책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정정책의 방법론에 들어가면 감세정책을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대단위 지출확대 주장도 나온다.
세금을 깎자
삼성경제연구소는 5일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적극적 감세정책을 제기하고 나섰다. 연구소는 "세금을 줄이면 가처분소득이 늘어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게 된다"며 "소비여력이 축소된 상황에서 감세정책이야말로 경기부양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감세정책이 빛을 본 경우는 미국이 대표적. 미국은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한계세율을 인하, IT발전의 원동력인 벤처캐피털 창출을 촉진시켰고 역사상 가계부채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1년에도 과감한 감세조치를 통해 경기침체 탈출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감세정책은 세부담이 줄어든 만큼 저축을 늘릴 것이기 때문에 소비진작엔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세수부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삼성연구소는 그러나 "저축증가는 부채상환과 미래 소비로 연결되기 때문에 소비여력은 그만큼 늘어날 것"이라며 "감세로 인한 세수부족은 경기 상승후 세율조정으로 풀면 된다"고 주장했다.
지출확대론
감세 보다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재정지출을 더 늘리고, 필요하다면 한국판 '뉴딜 정책'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삼성선물 최완석 리서치팀장은 "경기부양을 위해선 고용창출을 위한 재정지출 확대가 최선"이라고 말했다.
삼성연구소 관계자는 "재정지출확대는 적절한 사용처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 장애가 많고 일본도 장기불황탈출을 위해 97년이후 4차례나 지출확대정책을 폈지만 소비진작엔 실패했다"며 감세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은 관계자는 "근로소득자의 40%이상이 면세점 이하인 만큼 감세를 해도 소비확대 여부는 미지수"라며 "즉각적 부양효과는 지출확대가 더 크다"고 말했다.
한 정부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하며 "(과거식 토목공사투자가 아니라) 정부가 예산으로 전국에 첨단보건 시설을 짓고 생명과학에 집중 투자하는 현대판 뉴딜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감세든, 지출확대든 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에 미온적이다. 효과도 불분명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재정수지악화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경기침체로 세수가 줄어들고 실업급여 증가 등으로 지출이 확대되는 정도는 수용해야 하지만 재정악화를 초래할 정도로 재정역할이 커지는 것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成長엔진" 고장 오래가나
내년 경기가 올해보다 더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3%대 성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5% 내외로 추정되는 잠재성장률을 한참 밑도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의 공식 견해는 '하반기는 몰라도, 내년 정도면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경기회복이 가시화한다'는 것이다. 재정경제부 정은보 경제분석과장은 "최근 소비침체는 2002년 소비급증에 대한 반락이다. 2005년 정도면 반등하는 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일부 외국 기관들에서도 내년부터 내수가 살아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민간 연구기관들의 전망은 이와는 전혀 딴 판이다.
가계 입장에서는 돈이 생기면 빚부터 갚아야 하는 현상은 내년에도 계속될 것이란 분석이다. LG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2001년 2·4분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주택담보대출 상환압력은 내년에 최고조에 달할 전망이다. 취업자 수가 크게 늘어날 전망도 없어, 빚을 어느 정도 청산해도 고용불안이라는 소비의 또다른 장벽에 부닥치게 된다. 여기에다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구매력까지 줄어들면, 소비 증가를 피부로 느끼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수출도 문제다. 올해 수출은 지표경기가 그나마 모양새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올해 상반기까지 수출증가율은 38.4%에 달했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는 "내년 수출 증가율은 7.5%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경제의 조정으로 수요는 줄어드는 반면, 공급은 넘쳐나 가격하락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가격은 지난 4월 5.83달러에서 6월 4달러대로 떨어졌다. 반도체의 출하 대비 수주는 올들어 계속 내리막길이다. 세계적 공급 증가로 6월말 현재 PDP TV 가격은 4개월전보다 14% 하락했고, LCD TV는 연말까지 30∼40% 하락할 전망이다. 여기에다 고유가라는 악재가 내년 세계경기에 어느정도 찬물을 끼얹을 지도 예측불허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미 올 3분기를 정점으로 경기회복세가 꺾였다고 분석했다. 수출증가율이 올 3분기 34.5%에서 4분기 15.0%로 급락하면서, 성장률도 3분기 5.4%에서 3.8%로 크게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전기대비 연율로 따지면, 3분기 4.7%에서 4분기 1.8%로 급락하는 것이다. 경기회복을 실감도 하기 전에, 회복세가 꺾이면서 하강국면으로 돌아선다는 얘기다.
삼성연구소에 이어 다른 연구기관들도 9월에 잇따라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내릴 전망이다. 5%대 성장을 점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3%냐, 4%냐를 놓고 고민할 뿐이다. 지난해 워낙 낮은 성장률(3.1%)로 올해 반등하긴 했지만, 다시 지난해 수준으로 떨어져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하는 셈이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실질성장률이 2∼3년 연속으로 잠재성장율을 밑돌면 실제 우리나라 잠재성장력 자체가 줄어들게 된다"고 말했다. 내수부진 장기화에 수출둔화까지 겹치면서 장기불황 국면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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