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와 여러 차례의 인연을 갖고 있지만 그 중 1998년 11월과 2001년 5월의 두 번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두 번 다 내가 상당히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첫번째 사연은 소아마비여서 남의 도움없이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운전면허증과 관계된 것이었다. 학생운동과 재야민주화운동을 하다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98년11월그 해 1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한 나는 미국운전면허증을 한국면허로 바꾸러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에 갔다가 황당한 사태에 부닥쳤다. 미국운전면허증 소지자는 간단한 적성검사만 하면 한국운전면허증을 발급해준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담당자는 전동휠체어를 탄 나를 보더니 "장애인은 별도의 테스트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운동능력 테스트를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당시만해도 장애인에 대한 각종 배려가 전혀 없었던 한국에서는 장애인에게도 정상인에 버금가는 운동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다리만큼은 아니지만 양손도 불편한 상태여서 운동능력테스트를 통과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순간 나의 뇌리에는 미국면허를 따기까지의 고행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는 96년 봄부터 장애인운전연습차량을 보유한 시설에서 피나는 연습을 하고 6차례의 실패 끝에 드디어 97년 10월 운전면허시험에 합격했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나는 대학 친구인 윤승용기자(현 정치부장)에게 이 사연을 하소연했다. 며칠 안 돼 사회부의 최윤필기자(현 문화부기자)가 달려와 취재해가더니 내 스토리가 '1급장애 최민씨의 미 운전면허 국내면허 바꾸기 좌절과 분노'라는 타이틀로1998년 11월 7일자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 다음날 김세옥 당시 경찰청장이 장애인 운전면허 취득 기준을 규정한 도로교통법 시행령을 서둘러 개정, 장애인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속보도 실렸다.
보도가 있은 지 얼마 후 법이 보완되면서 나는 테스트를 통과해 꿈에도 그리던 한국면허를 받게 되었다. 언론의 힘을 새삼 실감했다. 한국일보의 이 보도로 지체장애인들의 이동권이 보장되는 작은 계기가 된 것이다.
두번째는 결혼에 얽힌 인연이다. 2001년 5월 당시 처가의 허락없이 그 해 4월에 아내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의 소재를 찾던 한국일보가 나에게 편지를 써줄 것을 의뢰해왔다. 나는 처와 함께 장인 장모님께 용서와 이해와 사랑을 구하는 편지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띄워 보냈다. 이를 계기로 장인장모님의 양해를 얻어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사랑받는 사위가 되었다. 여기서 약간 덧붙이자면, 내가 결혼하는 데 운전면허증이 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다. 내가 운전하는 차로 처를 태우고 동해안 바닷가로 드라이브해서 처음 사랑을 고백했고 처가집에서 아내가 새벽에 탈출했을 때 내가 직접 운전해 집에 데려오기도 했다. 이 모두가 한국일보와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창간 50주년을 맞은 한국일보에게 당부하고 싶다. 6년 전 나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줬던 한국일보가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또한 그것이 한국일보의 힘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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