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서울 시내 한 극장. 700여명의 배급관계자와 기자들이 영화 '슈렉 2'를 보기위해 모였다. 20여분이 지났을까,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이야기가 건너뛰었다. 웅성웅성. 영사기가 멈추었다. 아직도 필름의 순서를 바꿔 돌리는 경우도 있나. 이때 스크린 앞 단상으로 올라온 영화사 관계자의 설명. "실수로 두 번째 필름을 빠뜨리고 세번째 필름을 두통 가지고 왔습니다." 치명적이다. 그것도 영화에 대한 첫 인상을 결정하는 시사회에서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하다니.이 때 아무도 예상 못한 광경이 연출됐다. 단상에 오른 영화사 관계자가 "정말 죄송합니다. 3일 뒤에 다시 시사회를 열겠습니다"며 단상에서 '큰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그의 그런 모습에 700여명은 별다른 불평없이 돌아갔고, 3일 뒤 다시 시사회에 참석했다. 지금도 충무로에서는 그의 '큰 절'이 화제다. 그 주인공은 CJ 엔터테인먼트의 신승근 홍보부장. '큰 절'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큰 잘못을 했으니 큰 절로 사과하는 게 당연하죠." 홍보는 결점은 감추거나 이리저리 변명하고, 장점만 떠벌리는 게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주저 없이 사과하는 것이야말로 때론 최선의 홍보다.
홍보에서 자신의 것을 나쁘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두시간 후 시사회가 끝나면 탄로가 날 텐데도 어떤 영화제작자는 "이 영화 정말 잘 만들었어. 너무 재미있어"라고 태연스레 말한다. 한때 홍보를 담당했던 콜럼비아 트라이스타의 구창모 이사는 정반대다. "홍보하는 사람이 저래도 되나"싶을 정도였다. 시사회에 앞서 그는 "솔직히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블록버스터도 아니다. 그냥 킬링타임용이다. 그러니 눈높이를 낮춰라"고 한다. 심지어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라이벌 영화가 훨씬 재미있다고, 이 영화는 '비디오용'이란 말까지 한다. 그의 말을 듣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본 평론가들의 반응. "이런 영화치고는 꽤 잘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은 좀처럼 누구를 욕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누가 아무리 결점을 꼬집어도 "그래도 나보다 재주가 많다. 그런 것은 나는 죽어도 할 수 없다"면서 그 사람이 가진 장점을 이야기한다. 비단 한국영화계 최고 어른이란 체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디 영화계에만 있을까. 최근 한 모임에서 만난 손학규 경기도지사도 비슷했다. 나보다는 이런 저런 재능이 있다며 라이벌까지 기꺼이 칭찬했다. 그래서 오히려 '뉴스메이커로서의 이미지가 약하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
홍보에는 긍정적인 방식과 부정적인 방식이 있다. 앞에서 말한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정확하게 자기를 알리는 것, 상대의 장점을 거리낌없이 칭찬함으로써 나의 장점도 인정 받는 것 등은 모두 긍정적인 방식이다. 반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틈만 나면 욕하기, 그것도 모자라 저질 패러디 만들기, 서울 비하 광고처럼 나라 전체 망신은 안중에도 없이 우선 내 이익을 위해 '누워 침뱉기식' 헐뜯기 등은 부정적인 홍보 방식이다. 나만 늘 이기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남을 짓밟는데 온 힘을 쏟거나, 자기 허물은 감춘 채 남의 약점만 들춰내 떠벌리기에 바쁜 사람들에게 세상은 늘 '나 아니면 적들'이다. 그들이야말로 결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이대현 문화부장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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