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 피살사건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국정조사특위 청문회가 의혹만 부풀려놓은 채 3일 마무리됐다. 결국 이 사건은 감사원 특별감사에 이어 국회 청문회까지 거쳤지만 "뭐하나 속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됐다.특위는 사흘간의 청문회에서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과 이라크인 변호사 등 구명협상 당사자,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사무차장, 주 이라크 대사관 직원, AP통신 기자 등 핵심 증인들을 불러 놓고 의혹 풀기를 시도했다.
이번 청문회에서 새롭게 부각된 의혹의 핵심은 김씨 피랍 직후 AP가 입수한 원본 비디오 테이프.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공개한 원본 테이프는 당초 것의 3배 분량으로 김씨의 한국 내 주소지와 피랍 상황 등 구체적 정보가 담겨 있었다.
AP측이 모종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김씨 피랍사실을 늑장보도하고 테이프를 축소 편집 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정황이다.
하지만 AP측은 굳게 입을 닫았고 진실 규명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3일 청문회에서도 "AP통신이 김씨 피랍여부를 NSC측에 문의했던 것 아니냐"는 등 각종 설만 무성했을 뿐, 진실 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와 관련, AP와 외교부간의 통화 내역도 여전히 미궁속이다. AP통신측은 서울지국 3명의 직원이 외교부와 통화했다고 밝혔지만 누구와 언제 어떤 내용으로 통화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서울지국 최상훈 기자가 외교부 직원과 통화하면서 '김선일'을 언급했다는 증언이 지난달 30일 청문회에서 나왔지만 정작 AP통신은 최 기자의 증언을 가로막았다. 여야 의원들이 2일 공개질의서를 AP본사등에 보냈지만 AP가 얼마나 협조할 지는 미지수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은 피랍사실이 알려진 직후 외교부가 대사관에 정확한 피랍시점을 숨길 것을 지시한 비문과 한국인과 한국군을 대상으로 한 테러 단체가 이라크 내에 결성됐다는 첩보가 우리 당국에 보고된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대사관측이 이미 사망한 김선일씨에게 안부를 묻는 이메일을 발송했던 것으로 밝혀져 허술했던 교민관리 대책이 까발려지기도 했다.
'여당은 수비, 야당은 공격'이란 기존 관념을 깨고 여야 모두 외교·안보라인을 상대로 강도 높은 추궁을 벌이는 모습은 17대 국회 들어 달라진 청문회 모습이란 평가를 받았다. 증인들이 의원들의 추궁에 당당하게 맞받거나 해명하는 모습도 이전과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신변공개 위험" 증언석 흰천 둘러쳐
3일 오후 김선일씨 석방 협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라크인 변호사 E(여)씨와 가나무역 직원 A(여)씨 등 2명의 국회 청문회 증언은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됐다.
당초 국회 국정조사 특위는 1988년 청문회 제도 도입 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청문회 증언대에 선 이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비공개 증언을 고려했지만,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이들의 동의를 받아 증언과정을 제한적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이날 오후 3시 15분께 시작된 청문회 증언에 앞서 E씨 등은 기자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 상태에서 청문위원석 출입문을 통해 입장한 뒤 통역자와 함께 증언 석 한켠에 마련된 흰색 차단막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언론 공개는 이후에 이뤄져 기자들은 E씨 등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고, 증언 청취에 앞서 국조특위 유선호 위원장은 "직접적인 사진 촬영과 녹화를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E씨 등은 의원들의 질문을 통역자를 통해 전달 받은 뒤 통역자에게 답을 하고, 통역자가 이를 한국어로 의원들에게 전하는 식으로 증언했다.
이처럼 통역시간이 많이 걸린 탓에 때문에 의원들은 질의·응답에 할당됐던 30분 동안 불과 서너 가지의 질문에 만족해야 했다.
E씨는 증언에서 "김 사장이 직원보호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보지 않는다"며 형법상 유기치사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를 검토하겠다는 감사원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E씨는 특히 서너 차례에 걸쳐 "한국 정부가 너무 서둘러서 추가파병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김씨가 살해된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가나무역의 이라크인 직원인 A씨도 "김 사장이 김씨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도 노력했다"며 김 사장을 옹호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AP, 테이프 편집·외교부와 통화내역/감사원 추가조사
감사원은 국회'김선일씨 피살사건 조사특위'청문회에서 새롭게 제기된 의혹들을 추가로 조사하기로 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3일"지난달 28일 김씨 피살사건의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피랍 비디오테이프 원본이 확보되는 등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조사기간을 연장해 미진한 부분을 조사키로 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이 앞으로 조사할 부분은 미국 AP통신이 피랍 테이프 원본을 축소 편집한 이유와 AP 서울지국 기자들과 외교부 직원간 통화 내역과 등 2가지다.
AP통신이 당초 보도한 김씨 피랍 테이프는 원본의 3분의1 분량으로 축소 편집됐고, 원본에는 김씨의 한국 내 주소 등 신분확인이 가능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여야 의원들은 AP측이 핵심 부분을 빼고 테이프를 편집한 의도에 주목하고 있다. 감사원은 이에 따라 14분 분량을 4분여로 축소 편집한 경위 20여일간 김씨 피랍 및 테이프 존재를 밝히지 않은 이유 외교부 문의과정에서 신분확인을 소홀히 한 점 등을 묻는 질문서를 4일 AP통신 서울지국에 보낼 예정이다.
감사원은 또 외교부 정모 외무관 외에 다른 직원들이 AP기자로부터 문의 전화를 받았을 가능성도 집중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AP의 서모기자는 청문회에서 최모, 이모기자 등 2명도 외교부에 문의전화를 했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이 사실일 경우 다른 외교관들도 전화 문의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감사원은 AP측에 지난달 거부했던 최 기자 등의 휴대폰 통화내역 조사에 대한 동의와 함께 두 사람의 감사원 출석을 요청할 계획이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AP 원본테이프 왜 野의원 줬나"/물먹은 여당 감사원 성토
"감사원은 AP통신의 원본 테이프를 왜 특정 의원에 줬느냐?" "야당 의원에게 준 게 불만이냐."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3일 국회 김선일 국조특위 청문회가 시작되자마자 전날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AP 테이프를 단독 입수, 공개하게 된 경위부터 물고 늘어졌다. 제일 먼저 최성 의원이 "테이프가 여야 합의 없이 공개된 것에 대해 여야 공히 불만을 느낀다"고 트집을 잡았다.
"감사원이 우리당 윤호중 의원의 공식 요청은 무시하고 박 의원의 사적 요청만 받아들인 이유가 뭔가"(최재천 의원) "왜 국조특위에 공식 제출하지 않고 특정 의원에 줬나"(송영길 의원) 등 세칭 '물을 먹은'데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이에 한나라당이 발끈했다. 박진 의원은 "여당이 아닌 야당에 준 게 절차적 하자인가. 청문회 품격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목청을 높였고, 엄호성 의원도 "자료 입수 과정을 일일이 보고하라는 건 특위활동 무력화 시도"라고 공격했다.
30분 가까이 지난 뒤 유선호 특위위원장이 "어쨌든 실체적 진실은 규명했으니 자제 바란다"고 수습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감사원 관계자가 나서서 "우리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테이프 문제가 감사의 본질은 아닌 것 같다"고 해명한 뒤에야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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