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랴오닝(遼寧)성 퉁화(通化)를 출발해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으로 가는 도로로 접어든지 얼마 안 돼 길가에 대형 광고가 눈에 띄었다.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유적의 도시 지안' 지안을 관광도시로 선전하는 광고판이 100㎞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지안 시내 곳곳에는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자축하는 플래카드들이 걸려있다. '고구려 유적 세계문화유산 등록 성공을 열렬히 경축한다' '우수 관광도시 선정을 축하한다' 온통 축제 물결이다. 게다가 지린성과 지안시는 7월 20일부터 10월 15일까지 무려 3개월 가까이 '중국 지린·지안 고구려문화관광절' 행사를 벌이고 있다. 호텔에 도착해서 뜻밖에도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규정한 대표적인 책인 '중국고구려사'의 저자인 퉁화사범대 겅톄화(耿鐵華) 교수와 지안박물관 고구려 전문가들을 로비에서 만났다. 한때 지안박물관 부관장을 지낸 耿 교수는 "그냥 쉬러 왔다"고 했으나 이번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온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중국 역사에 맞춰 고구려사 안내
지안박물관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안내문에 현재 전시 유물은 모두 354점인데 주로 옛터 32곳과 성벽터 8곳, 고분군 75곳, 석비·석각 5개 등에서 발굴한 것이라고 소개해 놓았다. 안내문은 머리말에서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고 지방정권이다'고 강조했다. 유물의 연대도 한―왕망―후한―위―진―제―양―진―수―당 식으로 철저하게 중국 왕조 위주로 설명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고구려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사로 이해하도록 해놓았다.
장수왕릉에서는 중국 중앙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팀이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다. 耿 교수는 바로 이 다큐팀 해설자로 와 있었던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지안과 환런(桓仁)은 중국 전역의 매스컴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환도산성에서는 궁궐터, 남문터 장대(將臺·장수가 올라가서 지휘하는 곳), 서남문터가 새로 발굴됐다. 입구인 남문터는 대규모 발굴 덕분에 성문터 전체 구조와 축성법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이 성문 밑에 물을 빼던 배수구다.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있는 배수구는 당시 성문을 만들 때 배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현대의 기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 높은 공법이다. 정말 몇 년만에 성안으로 들어가 지난해 발굴했다는 장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궁궐터는 아직 정비가 안되어 볼 수가 없었다.
세계유산 등재 이후 자신감 넘쳐
이번 답사에서 가장 놀란 점은 박물관 내부와 벽화를 빼놓고는 어디서나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심지어 비디오 촬영까지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지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여행사 직원이 "이제 비디오도 마음대로 찍습니다"라고 했을 때 실은 반신반의했다. 최근 10여년 동안 한국인들이 수 없이 드나들었고 많은 방송사에서 현장 비디오 촬영을 시도했지만 한 번도 공식으로 허용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에게야 유적을 마음대로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한 일이지만 10년간 금지하던 것을 왜 갑자기 허용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 착잡했다. 중국은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고구려사가 중국사인 것을 세계가 인정한 것처럼 끌고 가고 있다. '이제는 찍어가 봐야 우리 역사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전후해 지안시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수 백억원을 들여 고구려 문화재 정비를 마친 지안시는 이제 주변 도로정비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퉁화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지안으로 갈 때는 1,000m 높이의 노령산맥 넘기가 늘 어려웠다. 다가오는 10월에 노령산맥 밑으로 굴을 뚫어 이동 시간을 30분 단축하고, 눈 오는 겨울에도 관광이 가능토록 할 계획이란다. 환런과 연결도로도 올해 안에 개통하고, 단둥(丹東)으로 가는 길에도 굴을 뚫어 5시간대에 도착토록 할 예정이다.
일본인 등 외국인도 대규모로 방문
이 모든 사업들은 환런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관광산업을 극대화해 수입을 올리고, 둘째 현지를 찾은 관광객에게 고구려 역사가 중국사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축하 행사도 바로 이런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지린성 정부 부비서장을 주임으로 하는 '중국 지린·지안 고구려문화관광절' 행사는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가 정부 지원금 260만 위안(약 4억 원)을 갖고 준비한 대규모 축제다. 첫 행사는 '지안 중국 우수 관광도시 명명식'. 지난 달 20일 열린 명명식에서는 전국의 유명 관광 도시에서 초청한 인사를 비롯하여 3만 명이 모인 가운데서 국가 관광국이 지안시를 중국우수관광도시로 선포했다.
지안시는 지난 한 해 동안 모든 고구려 문화재를 중국사로 편입하는데 주력했고, 올해는 그것을 관광사업이라는 매력적인 방법으로 국내외인에게 알리는 사업을 본격으로 시작한 것이다.
7월 9일 관광 재개 뒤 20일 만에 한국에서 학생, 교사 등 5,000명이 다녀 갔으며 올해 안에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예상한다는 여행사 사장의 즐거운 비명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했다. 내국인 관광객도 예전에는 주변 도시에서 주로 왔는데 지금은 남쪽지방에서도 많이 온다고 한다.
"지금 일본 관광객 1,000명이 답사를 신청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왜 고구려 유적을 보러 오는 겁니까?" 현지 여행사 직원의 물음에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보다 이제 우리는 고구려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 서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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