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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78>몽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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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78>몽포르

입력
2004.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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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5년 8월4일 영국 의회의 산파로 불리는 시몽 드 몽포르가 왕세자 에드워드의 군대와 벌인 이브셤 전투에서 사망했다. 향년은 60 전후로만 알려져 있다. 몽포르 집안은 중세 프랑스의 저명한 귀족 가문이다. 시몽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이도 이 집안에 여럿이어서 보통은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작위나 세호(世號)를 붙인다. 오늘의 주인공도 흔히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로 불린다. 그가 영국 백작이었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 시몽4세도 프랑스 백작이었다. '강건한 시몽'(Simon le Fort)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시몽4세는 십자군전쟁의 영웅이었다.시몽 드 몽포르는 외가인 레스터 백작 가문의 권리를 찾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3세의 누이와 결혼한 뒤 영국 귀족 사회의 실세가 되었다. 헨리3세가 실정을 거듭하자 몽포르는 1258년 반란을 일으켜 통치권을 15명의 대귀족에게 양도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옥스퍼드 조례를 국왕에게 강요했다. 일단 요구를 받아들였던 국왕은 교황의 부추김을 받아 세 해 뒤 이를 거부했고, 곧 왕과 귀족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포르의 귀족군은 친위군을 제압하고 왕을 사로잡은 뒤, 1265년 귀족·성직자·기사·자치시 대표 등이 참가하는 선량의회(Good Parliament)를 소집했다. 이것이 영국 의회의 효시다.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을 포함한 귀족들이 '잉글랜드인들의 공동체'를 대변해 국왕에게 저항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1066년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영국 정복 이래 자신들을 프랑스인 또는 노르망디인으로 생각했던 영국 귀족들이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됐다는 표지로 읽힌다. 감옥에서 탈출한 왕세자 에드워드는 친위군을 규합해 몽포르의 귀족군을 격파한 뒤 왕권을 회복시켰지만, 몽포르가 초석을 놓은 의회는 영국 정치체제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점차 힘을 키워갔다.

고종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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