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마당]박정희 시대의 추억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마당]박정희 시대의 추억

입력
2004.08.03 00:00
0 0

"당신 나라는 어떻게 그렇게 빠른 기간에 잘 살게 되었나?" 10여년 전 미국을 장기 여행할 때, 평범한 시민들로부터 두 번이나 들은 물음이다. 질문이 워낙 진지해서 두 번째는 미리 준비했다가 답변했다. "한국인은 교육열이 매우 높아서, 우수한 노동력이 많다. 우리는 어느 민족 못지않게 근면하고, 또 일을 많이 한다. 마지막으로, 독재자이긴 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대식 행정을 경제개발계획에 도입해서 현대화를 추진한 것이 신속한 발전의 바탕이었다고 생각한다."지금도 생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외국인 앞에서 털어놓기 싫던 말이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다. 낮은 차원에서 인권 얘기를 꺼내고 싶다. 20대 때 '장발 단속'에 두 번 걸려 머리를 짧게 잘렸다. 한 파출소 경찰은 "외국인하고는 구별돼야 할 것 아니냐?"고 제 딴의 근거를 밝혔고, 다른 곳에서는 "머리 긴 놈들이 가장 나쁜 놈들"이라고 등수를 매겼다. '치마 길이 단속'도 있었으니, 머리 염색이나 배꼽티를 입는 자유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 남북대치 상황이 강조되고, 민주적 가치 대신 충효사상이 재무장되어 국가를 봉건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군대에서 국민투표도 두 번 했다. 1972년 유신헌법 찬반 투표와 75년 또 한번의 같은 투표였다. 반대투표한 것을 아는 선임하사는 전출 가는 내게 "기록이 따라다니니, 어딜 가든 군대생활 잘 하라"는 인간적 충고를 해주었다. 투표는 독재정치를 강화하는 절차였다. 3선 개헌에서 유신으로, 다시 유신헌법을 지키기 위한 긴급조치로, 권력의 명은 이어졌다.

그 기간을 김대중 납치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인혁당 사건 등이 암울하게 수 놓고 있다. 75년 2월 이철 김지하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형 등으로 석방됐지만, 그해 4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은 사형이 확정되어 20시간 만에 사형이 기습적으로 집행됐다. 이 사건은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데다 조사과정의 고문까지 밝혀져, 반독재 투쟁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유신정권의 용공조작이라는 의혹이 줄곧 제기돼 왔다. 결국 2002년 의문사 진상규명위는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그 속에서 야심 찬 1∼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됐다. 새마을사업이 진행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중화학공업화 시대가 선언되고, 중동진출이 이뤄졌다. 억압적 정권 아래서 경제가 압축성장 도로를 질주한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을 시작한 1961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암살되던 79년에는 1,647달러로 높아졌다.

박정희는 장기독재와 인권탄압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졸지에 측근에게 암살됨으로써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평가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의 장녀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 다시 선출됨으로써, 최근 박정희 시대 평가가 불붙기 시작했다. 포문은 박 대표가 먼저 열었다.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을 거론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하자, 청와대는 유신 독재시대의 잣대로 정체성을 재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를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자아분열증 같은 이율배반적 정서에 젖게 된다. 경제발전과 인권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를 명료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칠게 말하면, 박정희의 공과는 제로이거나 마이너스 쪽에 가깝다. 처음 경제발전을 인정하던 국민도 유신 이후에는 독재와 장기집권에 심한 염증과 저항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압력이 측근으로 하여금 배신의 총을 겨누게 만들었다.

논쟁의 한 쪽을 거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박정희 평가는 정치권이 이해에 따라 다툼을 벌이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학자들이 냉철하고 철저하게 분석할 몫이다. 바이츠제커의 말처럼, 과거에 눈 감는 자는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된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