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지미 카터입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습니다."지난달 26일 보스턴 플릿 센터에서 열린 미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찬조 연사로 나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한 인사말이다. 연설의 처음을 장식한 이 조크가 전당대회장을 웃음과 박수로 가득차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대의원들 사이에 넓게 퍼져나가는 웃음의 물결을 타면서 하고 싶은 말을 던졌다. "하지만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존 케리와 존 에드워즈를 백악관으로 보낼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할 것이다"라고.
청중들을 편하게 만들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카터 전 대통령은 참 멋있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살이 깊게 파인 여든의 나이였지만 그의 연설은 뒷방 노인의 고리타분함 대신 유머와 가슴 뭉클한 호소가 적절히 조화된 음악처럼 들렸다.
민주당 전당대회는 시종 그랬다. 그들이 그토록 몰아내고 싶어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능멸하기 보다는 풍자와 해학으로 비난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그랬다. 부시 정부의 세금감면 혜택을 '있는 자를 위한 정책'으로 비판하면서 그는 거친 얘기들을 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 경험을 재미있게 얘기했을 뿐이다. "제가 대통령에서 물러나 돈을 많이 벌게 되니까 공화당이 가장 아끼는 부류가 되더군요. 공화당이 (세금 감면으로) 저를 이렇게 끔찍이 생각해 줄 날이 올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들의 전당대회는 감동적인 문장, 기지 넘치는 표현으로 가득한 말의 성찬(盛饌)이었다. CNN을 통해 민주당 전당대회 나흘을 보면서 시종 유쾌했다.
그러나 채널만 바꾸면 갑자기 기분이 달라진다.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혼신의 힘을 다해 들어야 하는 CNN 방송과는 달리,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우리 방송은 불쾌하다. 방송 기자들의 말이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한국 정치의 말들이 험해서다.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됐다는 말조차 충분치 않을 정도로 젊은 세대들이 여의도 국회에 진출했지만 여전히 능멸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좀 비약하면 정치는 곧 말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명분이 훌륭하고 올바르다 해도 그것을 전하는 말이 거칠면, 정치의 수준은 급전직하한다.
국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단정적이고 거친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 표현이 직설적이고 서민적이어서 속 시원하다며 반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처음 한 두 번은 통쾌할 수 있지만 자주 반복되다 보면, 부담스럽게 된다.
이쯤 해서 최근 타계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을 인용해보자. 그는 재임 시절 구 소련과의 군비경쟁 때문에 천문학적인 국방예산을 지출했고 이 때문에 언론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한번은 백악관 기자들이 기자회견을 앞두고 B1 장거리 폭격기의 과다한 예산을 문제 삼기로 의견을 모았다. 기자회견에서 첫 질문자가 자세한 통계를 들어가며 거칠게 문제 제기를 했다. 레이건은 언짢은 표정을 짓기는커녕 캐스퍼 와인버거 안보보좌관을 쳐다보며 "어이, 무슨 비타민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나.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했다. B1을 비타민의 약자로 비유한 조크로 회견장은 폭소의 도가니가 됐고 그 틈을 타 레이건은 "넥스트(다음 질문자)"라고 호명하며 난감한 주제에서 벗어났다.
가벼움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 마냥 진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끔은 국민들도 즐거운 정치를 볼 권리를 갖고 있다.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보면서 비판마저도 격조있는 유머와 풍자로 채색할 수 있는 여유가 새삼 부러워진다.
/이영성 국제부장 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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