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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34>박노준 SBS 야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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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34>박노준 SBS 야구해설위원

입력
2004.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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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봉황대기의 추억에 젖는다. 1981년8월26일. 생일은 까먹어도 이날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제는 흑백사진 앨범에 묻혀버린 23년 전의 일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일이 더욱 생생해진다. 아직도 야구해설가라기 보다 '비운의 고교스타'로 나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올드팬들을 위해 그 때의 심경과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싶다. 야구장과 TV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며 나에게 위로를 전했던 그 분들에게 지극히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해마다 이맘때면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 야구팀들은 4대 메이저 중에서도 가장 주목 받는 봉황대기 준비에 구슬땀을 흘렸다. 선린상고 3학년이던 나에게는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대통령배를 이틀 앞두고 타격 연습 도중 파울 타구에 코뼈가 내려앉는 부상을 당했다. 마운드에 서 보지도 못한 채 김정수(현 한화코치)가 활약한 광주진흥고에 패해 1회전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청룡기에서는 연장전에서 경북고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선린상고는 저학년 시절 전국대회를 3번이나 제패하던 주전멤버들을 중심으로 예선이 치열했던 서울시 대회에서 일년 내내 무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던 천하무적의 강팀이었다. 우리는 초조할 수 밖에 없었다.

81년 봉황대기(11회)에서 반드시 우승컵을 차지해야 할 이유는 한가지 더 있었다. 전국 모든 팀이 예선을 치르지 않는 그야말로 고교야구 최대 축제를 만든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1977년 작고)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모교의 대선배(27회 졸업)로 부총리까지 지내며 물심양면으로 선린상고를 지원했던 장 사주의 영전에 첫 우승을 바쳐야 한다는 동문들의 진심어린 압력(?)이 어느 때보다 거셌다.

돌이켜보면 24일 4강전에 이어 예정돼 있던 25일 결승전이 비로 하루 순연된 것이 불운의 전조였다. 선발로 나와 경북고의 1회초 공격을 가볍게 막은 뒤 1회말 적시타를 때리면서 기세를 올린 나는 5번 이경재의 적시타 때 홈으로 뛰어들었다. 볼이 포수 뒤로 빠지는 줄도 모르고 포수를 피하기 위해 사이드슬라이딩을 하는 순간 왼쪽 발 스파이크에 붙어있는 쇠징이 땅에 박히면서 발목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홈플레이트를 밟아야 한다는 일념에 엉금엉금 기어서 홈 플레이트를 찍은 뒤 쓰러져 버렸다. 엄지발가락이 뒤로 돌아가 복숭아 뼈의 바깥쪽 두 군데가 부러졌고 안쪽에 있는 인대는 모두 끊어져 15㎝의 철심과 나사로 고정시키고 인대를 잇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승전 전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먼지를 일으키며 멋들어진 슬라이딩 장면을 보여줄 상황이었지만 물먹은 모래땅이라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 이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 아득한 통증과 함께 화려하던 나의 고교야구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재활의 고통을 통해서 나는 절망을 이기는 법을 터득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일보의 봉황대기는 내 인생의 이정표였고 동시에 전환점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봉황대기가 내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23년 전 성동구장(현 동대문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열정과 함성, 그리고 좌절, 이후 많은 분들의 고마움 등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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