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창간된 1954년에 태어났으니, 한국일보와 50세 동갑인 나. 한국일보와의 각별한 인연은 매일 오후 대문 앞에 지켜서서 발을 동동거리며 '소년한국'을 기다렸던 초등학교 시절부터다.집앞 골목을 바람처럼 들어서던 배달소년에게서 뺏다시피 신문을 뽑아 펼쳐들면 훅 끼쳐오던 신문냄새와 함께 행복에 빠져들었던 기억. '수호지' '헨리' 만화, 그리고 이원복의 연재만화들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투명인간' '푸른 말의 전설' 등 연재동화를 읽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어린시절, 기자와 작가는 이 세상 최고의 최상의 직업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신문기자를 했는데 신문반 선배 좌담회에 참석한 한국일보 외신부의 노서경 기자가 너무나 멋있게 보였고, 한국일보 외신부로 찾아가 세계 유명신문을 얻어서 학교에서 '세계의 신문'이라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때 나는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로 장래직업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대학4학년이 되자 무조건 한국일보 외신부로 곧장 찾아갔다. 노서경 선배는 이미 퇴사했다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김시복 기자가 무슨 일로 그 분을 찾느냐고 물었다. "한국일보 기자가 되려고 왔다"고 하니까 빙그레 웃으며 마침 그날 나온 한국일보 31기 수습기자모집 사고를 오려서 주었다.
당시 나와 함께 스물 다섯 살이었던 한국일보는 젊은 신문, 특종이 많고 거리낌없이 생생한 기사를 전하는 사회면이 자랑인 신문이었다. 건강, 젊음, 자유로움, 여름날 우거진 나뭇잎 색깔인 한국일보 사기(社旗)의 진초록이 그대로 기자들의 색깔이며 분위기였다. 백상(百想)이라는 아호나 '25시의 사나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생각많고 부지런했던 장기영 사주가 "기자는 좋은 기사를 쓰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유명(?) 기자들의 기행(奇行)을 감싸며 자유로운 취재활동을 독려한 것이 그런 젊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외신부에는 베트남 함락 마지막 날까지 남아 종군 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안병찬 기자가 무용담을 자랑하고 있었고, 사회부에는 지금은 '칼의 노래' 작가로 더 유명한 핸섬한 편인 김훈 기자가, 주간부에는 이성부 시인이 써야 하는 빈 원고지를 앞에 두고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논설위원이었던 정광모 선배는 걸핏하면 후배 여기자들을 직접 모는 차에 태워 비싼 저녁 사주며 격려해주었고, '얼굴'이라는 교과서에 실린 수필로 유명한 수필가 조경희씨, '별님을 사랑한 이야기'의 동화 작가 이영희씨는 문화부장이었으니 한국일보 편집국에는 당대 이름을 날렸던 소위 여류(편집국 기자들 사이에는 그저 '오리궁둥이'나 '찰스 브론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지만) 명사들이 오골오골 다 모여있었던 것 같다.
기자이거나 작가… 많은 한국일보의 전직 기자가 그랬듯, 나는 기자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었고 내가 쓰는 드라마 속에 짧았지만 즐거웠던 한국일보에서의 체험을 많이 집어넣었다. 드라마 '질투'에서 최진실의 엄마인 소설가 김창숙은 한국일보 문화센터 강사였고, KBS주말 드라마 '연인'에서 신애라는 연예부 기자, 김창숙은 부장이었다. 드라마 작가 데뷔때 첫 인터뷰를 해준 사람은 한국일보 문화부의 이대현 기자였고,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애인'의 대형 인터뷰 기사도 다른 신문에는 거절하고 한국일보하고만 했다.
한국일보는 청년 때는 사회면이 유명하더니, 장년에 접어들며 '장명수 칼럼' 때문에 구독한다는 사람이 있을 만큼 칼럼과 문화면이 자랑인 신문이 된 것같다.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며 풍부한 읽을 거리로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일보. 오십이 넘어도 영원히 청정한 녹색신문으로 날로 척박해지는 우리사회의 청량제 역할을 해주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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