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연쇄 살인 사건을 보면서 참담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는 나쁜 사람이다. 무슨 이유가 있건, 어떤 사정이건 그가 한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정신과 의사로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진찰한 적도 없지만, 어떻게 온전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런 일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참담하게 한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이탈자는 있게 마련이다. 세상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증오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한들 사회가 건강하다면 어떻게 이런 일까지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웃에게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혹여 알게 되더라도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로 관심이 가지 않는 사회. 이렇게 병든 사회의 주체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번씩 자신을 돌아보고 최소한의 책임의식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고 하면서 신생아 때부터 온갖 정성을 다하여 키운다. 불우한 상황 때문에 버려진 아이들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오늘도 다른 나라로 입양되고 있다. 내 아이에게 온갖 맛있는 음식을 다 챙겨주면서도 내 아이와 같은 반에 결식아동이 있는 줄은 모르고 지낸다. 내 차를 깨끗하게 하고 싶어서 담배꽁초는 길가에 버린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들므로, 소외되고 낙오된 사람들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아이에게만 집중된 사랑은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고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따돌림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그리고 이제 내 이웃의 소외감과 불만은 증오가 되어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서양 문화는 '나' 중심이어서 개인주의적인 반면, 한국 사회는 '우리' 중심이어서 공동체 의식도 강하고 협동도 잘된다고 은근히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란 단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지독히 배타적이며, 집단적 이기주의를 나타내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나와 우리 가족만 잘 된다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희대의 살인 사건 앞에서 누구를 탓하고 질책만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신과 이웃을 돌아볼 때이다.
/하규섭 분당 서울대병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