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가까이 저러고 있어. 올림픽에 나간다고 하더니만. 맞아?”27일 강원 횡계. 마실 나온 산골 어르신이 혀를 끌끌 찬다. 푸른 눈의 꺽다리 외국인과 멀쩡한 청년 대여섯 명이 저만치에서 경망스럽게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오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뭔 짓인지 몰라. 그냥 뛰면 될 것을…. 보고 있으면 속 터져.”
마을 노인들의 의혹에 찬 눈초리는 아랑곳없다.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하는 5명의 경보대표팀은 2주 앞으로 다가온 올림픽 막바지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한국 육상 처음으로 초빙된 폴란드 출신 외국인 지도자 보단 브라코브스키(54) 코치는 “아빼 보꼬(앞에 보고)” “골방, 유즈 잇(골반을 이용해)”을 외치며 선수들을 독려한다. “앞을 봐야 힘이 덜 들고 골반을 이용해야 보폭이 늘고 자세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보단 코치의 설명이다.
강둑 사이에 난 2.5㎞ 도로를 벌써 몇 바퀴째 걷고 또 걷느라 선수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다. 보는 사람만 답답할까. 정작 속 터지는 건 한달음에 내달릴 거리를 뛸 수 없다는 것이다. ‘0.01초라도 두 발이 모두 공중에 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보의 철칙에 짓눌리 수밖에 없다. ‘달리고 싶다’는 치명적인 유혹을 이겨내려면 항상 무릎을 펴고 양쪽 발뒤꿈치를 땅에 대어야만 한다. 그러한 자세는 ‘오리궁뎅이 모습’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잠시라도 두 발이 동시에 허공에 뜬 혐의가 있는, 달리기를 한 듯한 선수에겐 두 차례 경고를 거쳐 세 번째 적발되면 곧바로 실격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경보 선수들이 50㎞를 4시간(올림픽 A기준)대에 끊으니까 100m를 28초에 ‘걷는’ 셈이다. 보통걷기(시속5㎞)보다 세배 가까이 빠른 속도니 현대판 축지법이다.
경보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이 1997년부터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는 종목이다. 지난해 11월 세계 최고의 경보 코치로 이름을 날린 보단을 영입한 것도 그 일환이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기대 속에 이번 아테네올림픽에 역대 최다로 다섯 명이 출전한다.
요즘은 고지대인 강원 횡계에서 막바지 훈련을 하고있다. 마라톤이나 장거리 등을 하다가 뒤쳐지면 으레껏 들었던 “차라리 걸어 다녀라”는 모욕. 그러다 등 떼밀려 시작한 ‘정말로 걸어다니는 경기’였다. 그동안 한번도 올림픽 메달권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늘 관심에서 저만치 비껴 난 종목이지만 선수들은 이번 만큼은 어느 때보다 이를 악물고 있다.
국내 처음으로 50㎞에 도전해 첫 완주와 함께 올림픽 출전권을 딴 김동영(24)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고, 20㎞ 이대로(24)는 “자세 교정으로 보폭도 넓어지고 실격에 대한 두려움도 털었다”고 했다. 올해 20㎞ 한국기록(1시간21분48초)을 작성한 신일용(25)은 “톱10을 넘어 메달권에 들고 싶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모두 보단 코치 덕이다. 그는 한국에 온 뒤 선수들의 자세부터 고쳤다. 그는 “엉성한 폼 때문에 실격도 많고 기록도 늘지 않는 것 같아 팔 치는 것, 골반 사용법, 보폭 넓히기 등 기본부터 착실히 가르쳤다”고 했다. 여자 경보의 간판 김미정(25)은 “자세가 부드러워지고 속도도 늘었다”고 했다.
성급하게 메달 가능성을 물었더니 보단 코치는 “모두 실격 없이 20위안에 드는 게 목표입니다. 스포츠는 기적이 아닙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보단 코치는 인터뷰 내내 각 선수의 장단점을 소개하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한마디까지 챙길 정도로 경보에 대한 애정이 깊다.
사랑하면 미움도 생기는 법. 그는 “등록선수가 고작 100명이라 경쟁이 없는 한국에선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게을러질 수밖에 없어요. 외국 코치 초빙보다 국제대회에 자꾸 출전시키는 게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야 바라는 메달이 2008베이징올림픽에선 나올 수 있다는 설명이다.
보단 코치가 레이스에서 뒤쳐지는 팀 막내 박칠성(23)을 불러놓곤 “첫 발짝부터 너 자신을 믿어”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진꾸에 바르조(고맙습니다)!”
횡계=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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