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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기억하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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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기억하라! 기억하라!

입력
2004.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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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득권자들이 공동체의 상처를 아물린답시고 내리는 처방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망각을 통한 화해'다. 장기사(長期史) 수준에서 이 처방이 그 나름의 효험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공동체가 꽤 단단한 통합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기억만이 아니라 망각까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역사적으로 민족의 형성 과정은 거의 예외 없이 폭력적 정복과 학살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런 피비린내 나는 폭력 체험이 집단적 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면 민족정체성이라는 것이 도시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이것은 개인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경험하는 모든 것을 현미경사진기처럼 기억하는 사람은 도무지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명수 푸네스'의 주인공 이레네오 푸네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평범한 농촌 소년 푸네스는 어느 날 말에서 떨어져 뇌를 다친 뒤 무한대의 기억력을 지니게 됐다. 그의 귀에 들리는 모든 단어와 숫자는 그대로 뇌에 입력돼 지워질 줄 모르고, 그가 본 모든 숲의 모든 나무의 모든 잎사귀가 그의 뇌에서 떠나지 않는다. 푸네스는 이 모든 자잘한 기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불망증(不忘症) 환자로 소설 주인공이 아닌 실제 인물에 대한 보고도 있다. 옛 소련의 신경정신과 의사 알렉산드르 루리야가 30여 년 동안 관찰한 셰레셰프스키라는 사나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셰레셰프스키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대상을 세세히 개별화해 기억하는 바람에 개념을 형성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머리는 하나하나의 구체적 고양이들, 구체적 개들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어서, '고양이'라는 개념, '개'라는 개념이 들어설 수가 없었다. 마침내 루리야는 셰레셰프스키를 돕기 위해 '레토테크닉'(망각의 기술)이라는 치료법을 고안하기까지 했다.

'레토테크닉'이라는 조어는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동굴 너머에 흐르고 있다는 망각의 강 레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레테는 망각의 여신 이름이기도 한데,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그녀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신화적 은유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또렷하지 않지만, 공적 차원에서든 사적 차원에서든 불화의 치유제가 더러 망각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망각의 유혹은 가해자들에게나 피해자들에게나 늘 강렬하다.

그러나 특히 공적 차원에서, 망각을 통한 불화의 치유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해결을 뒤로 미루는 것일 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유예 기간 동안 불화의 상처는 더 커지며 곪아간다. 전두환 집권 기간 내내 광주학살은 강요된 망각의 동굴 안에 갇혀 있었지만, 그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6·25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나 군사정권 시절의 숱한 의문사도 그렇다. 진정한 화해는 진정한 용서 위에서만 가능하고, 진정한 용서는 드러낸 진실을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인정하고 기억할 때만 가능하다.

기억은 역사의 보복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제 한 목숨 건지겠다고 먼저 내뺀 주제에 제가 버린 시민들을 부역자로 몰아 마구 학살한 자가 이승만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을 때, 그 자신 좌익사범 출신인 처지에 비판자들을 북의 간첩으로 몰아 교수대로 보낸 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우리가 잊을 때, 피 묻은 손으로 시민들의 자유를 옥죈 뒤 지금까지도 피 묻은 돈을 꽁꽁 간직하고 있는 자가 전두환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을 때, 역사는 또 다른 도살자의 손을 통해 반드시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친일진상규명법이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수호하는 것이 모든 양식 있는 시민의 의무가 돼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역사의 '삭제 키'는 섣불리 누를 수 없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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