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미국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3차 6자회담 이후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과 존 볼튼 국무부차관 등 고위급 인사들이 각각 한국을 방문해 미국의 북핵 문제 해법을 제시하고 돌아갔다.이들은 11월 미 대선 이전에 북핵 문제의 외교적 타결을 희망하면서 그 대안으로 리비아식 해법을 강조했다. 즉, 북한이 리비아처럼 먼저 대량살상무기의 포기를 선언하고 핵 무기의 완전한 해체를 전제로 검증 가능한 사찰을 수용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북 경제제재의 해제, 광범위한 에너지 및 경제 지원, 그리고 연락사무소의 설치 등이 인센티브로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전향적 제안에 대해 북한 측은 다분히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7월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리비아식' 선 핵포기 방식은 일고의 논의가치도 없다고 일축하며 동시행동원칙에 기초한 일괄타결 방식과 '동결 대 보상' 이라는 종래 입장을 고수했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 표명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리비아식 해법 적용에 있어 미국이 보이고 있는 이중기준 때문이다. 북한은 핵 무기의 완전한, 그리고 검증 가능한 폐기라는 리비아식 해법의 목표를 수용할 용의가 있음을 수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리비아와 다른 기준의 접근방식을 북한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리비아는 북한과 달리 대량살상무기 개발의 초기단계에 있던 국가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대 리비아 접근은 훨씬 신중하게 추진된 바 있다. 우선 리비아 국내 사정에 정통한 영국과 이탈리아 정보기관을 이용해 대 리비아 접근 통로를 은밀하게 뚫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대신해 영국 정보기관이 리비아와 9개월에 걸친 비밀 협상에 임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리비아 지도자 가다피의 3남인 세이프 알 이슬람을 포섭해 최고 결정권자인 가다피에 접근했고 대량살상무기의 포기대가로서 미국측의 체제안전보장을 담보해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상 간의 비밀외교를 통해 대 리비아 접근을 관료정치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미국의 대북 핵 정책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듯이 미 외교정책의 가장 큰 폐단은 관료정치와 행정부처 간의 분절구조에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는 비밀협상을 통해 리비아 사안을 직접 집중 관리함으로써 관료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이미 핵 무기를 보유했거나 보유 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 정치권력의 속성으로 보아 지금이라도 미국이 리비아식 해법에 근거하여 북한과 고위급 양자 비밀 접촉을 갖고 핵 포기와 안전보장을 연계, 이를 6자 회담에 반영시킨다면 사태 해결은 훨씬 용이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은 '선 핵 포기'라는 목표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 접근 방식에 있어서도 리비아식 해법을 신축성 있게 북한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자 접근을 일관되게 주장해 온 부시 행정부로서 대선을 앞두고 대북 양자 비밀접촉이라는 카드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부시대통령이 리비아문제 해결을 위해 블레어 총리를 내세웠듯이 노무현 대통령이나 고이즈미 총리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형식에 구애 받지 말고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문정인/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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