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요즘엔 대중가요 가수에 의해 댄스곡으로 편곡되어서 불리기도 하고, 텔레비전 광고 배경음악으로도 등장하는 유행가가 되어버린 바로 그 노래. 1980년대에 우리는 그 노래를 막걸리 집에 앉아 쇠젓가락이 휘어지도록 밥상을 두드리며 목청이 터져라 불러댔다. 정말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왠지 서러운 감정에 북받쳐서.암울한 날들이었다. 학교 전체가 하얀 헬멧을 쓴 깡패 같은 사복경찰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다. 바늘 끝만한 틈이라도 보이면 학생회관 앞에서, 도서관 뒤에서, 마치 어릴 적에 병정놀이를 하듯, 그렇게 "싸움"을 했다. 방패와 곤봉에 맞아 머리가 깨져 피범벅이 돼도 전날 밤에 부르던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라는 노래 가사를 되뇌며 좁은 닭장차에 실려 조류독감에 걸린 닭 모양으로 까무러쳤다.
좋은 날이 오려면 없어져야 할 적은 분명했다. 정권을 강탈하기 위해 국민들을 학살하고 우리들의 미래마저 억압하고 있는 군사독재. 그 군부독재와 결탁하여 부당한 이득을 챙기는 재벌 기업들. 광주항쟁 이후 그 둘을 뒷바라지해 주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미국.
사노라니 어느덧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이제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날"이 왔다. 오매불망 외치던 대로 군사독재는 끝장났다. 독재정권의 부당한 탄압을 온몸으로 저항하던 자들이 이제 정권의 주역이 되었다.
적들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예전 같지는 않다. 군사독재의 상징으로 수없이 화형식을 당했던 그 잔혹한 독재자는 이제 29만 원밖에 없다며 불쌍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온 국민으로 하여금 허탈한 미소를 짓게 만들고 있다. 재벌 기업들은 강성 노조와 부유층에 대한 반감 때문에 못해먹겠다며 아우성이다. 요즈음 언론과 국민 여론에 비친 재벌 기업들은 노조와 정치인들 때문에 기업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쌍한 피해자다.
잘못된 미국의 대외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는커녕 눈치만 보는 현 정권이나 지식인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주류 언론에 대한 비판이 마이클 무어 감독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미국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자신에 대한 가장 혹독하고도 냉정한 비판이 자기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은 자기수정의 힘을 지닌 강력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한국의 여론과 정부는 조지 W 부시가 곧 미국인양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일시적인 병리적 현상이지 미국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전두환이나 박정희가 곧 대한민국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날은 왔건만 요즈음 젊은이들을 보면 차라리 좋은 날이 안 왔으니만 못해 보인다. 취직도 안되고, 희망도 없고, 싸울 대상마저 없어 보인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게 우리가 20년 전에 바라던 좋은 세상의 모습인가?
21세기 초, 대한민국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원조 군사독재자의 딸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야당 대표가 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확실하고도 잔인하게 짓밟은 사람이 바로 박정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국가정체성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식으로 국가발전계획이란 것을 세워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박정희인데도,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시장경제 옹호자라 자처하고 있다.
일제시대가 끝났어도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고, 민주화가 됐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독재자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뒤죽박죽의 혼란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가장 대한민국답게 하는 대한민국만의 국가정체성인지도 모르겠다.
/김주환 연세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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