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맹위가 거세다. 여름은 더워야 제격이라고 하지만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듯 싶다. 그래서 피서행락객이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에 치이는 유명 피서지는 오히려 짜증을 더욱 돋운다.가볍게 오가며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피서지는 없을까. 휴양림이 좋겠지만 대부분 산자락에 있고 예약도 쉽지않다.
이런 여행객에게 적당한 곳이 있다. 경남 함양에 위치한 상림이다. 마을 인근에 위치한데다 평지에 조성돼있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산책 도중 만나는 정자에서 한잠을 청하고, 산책로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책읽기도 좋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게으른 여행이 기다린다.
상림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이다. 9세기 말 진성여왕때 고을부사로 부임한 최치원선생이 조성했다고 하니 천년을 훌쩍 넘었다. 당시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이 홍수때마다 범람, 마을에 큰 피해를 입혔다.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마을 중앙에 둑을 세우고 조경을 위해 숲을 만들었다.
나무는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가져왔다. 대관림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숲의 규모는 길이만 3㎞에 달했으나 일제시대 마을이 생기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 지금은 길이 1.6㎞, 폭 80~200m의 상림만 전한다.
상림의 첫 인상은 다듬어지지 않은 소박함이다. 소박하다 못해 투박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조화를 갖추고 있다. 숲에 들면 산책로를 따라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을 드리웠다.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심어져 있는 것 같아 인공림이란 느낌이 들지않지만 잘 보면 다양한 나무들이 적당히 배열돼 있다.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나무는 120여종, 2만여그루. 대다수 휴양림이 사철 푸른 소나무로 조성된 것과는 달리 낙엽수와 활엽수로 구성돼 계절에 따라 다른 색채를 만들어낸다. 신록, 녹음, 단풍, 설경이 모두 다른 느낌이다. 자연보다 더욱 자연스런 모습이 상림의 얼굴이다.
숲 중앙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개울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충분한 수분을 나무에 공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상림 전체가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된 것에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숲에는 함양주민의 삶과 역사가 숨쉰다. 천년 세월을 마을주민들과 호흡을 같이 해와 선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마을의 이름난 기념물도 여기에 몰려있다.
조선 후기 조성된 척화비가 숲 입구에 버티고 섰고, 함양읍성의 문으로 사용된 함화루도 이곳에 옮겨졌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의 기념비는 물론, 함양의 한 개울가에서 발견된 석불도 모셔져 있다. 상림과는 관계없는 유물들이지만 이젠 상림을 이루는 구성원이 돼버렸다.
최치원 선생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제시대 최치원선생의 후손인 경주 최씨문중에서 세운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와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정자 ‘사운정’도 있다.
이 곳에서 느끼는 감흥은 위엄보다는 친근감이다. 정자에 드니 낯선 이방인에 대한 마을 어르신의 관심이 쏟아진다. 어디서 왔느냐, 나이가 몇이냐를 묻더니 이내 술잔을 건넨다. 한사코 사양하니 어른의 성의를 무시한다며 정색한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한잔 들이키니 이내 친근한 미소로 화답한다. 이방인이 어느새 친근한 마을 청년이 됐다.
최치원 선생은 함양태수를 마지막으로 속세와의 인연을 등지고 지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됐다. 상림은 도인이 되기 전 그가 만든 최후의 작품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전설은 도술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숲을 조성하는 나무들을 하루만에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가져왔고, 금호미 한자루로 숲을 만드는데도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선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상림에 들었는데, 뱀이 나타나 놀라게 하자 주문을 외워 상림에 벌레 한마리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전설 때문인지 상림에는 지금도 벌레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운정에 누운 한 주민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폭염이 연일 기승을 부린다는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상림에서 만큼은 여름은 없었다.
/상림(함양)=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정자의 고향 함양
함양은 민족의 명산인 지리산과 덕유산을 품에 안은 곳이다. 이중 남덕유산(1,506m)의 연봉인 기백산, 황석산, 월봉상, 망운봉 등으로 둘러싸인 안의면 일대는 계곡미가 빼어난 곳으로 이름나 있다. 깊고 높은 산을 끼고 있으니 계곡이 아름답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터.
이중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 일대는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곳이다. 음풍농월을 즐기던 풍류객들이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다. 8개의 이름난 못에 8개의 정자가 지어졌다.
이른바 8정8담(八亭八潭)으로 불리는 안의 지역의 정자는 조선시대 풍류객들의 질펀한 놀이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정자마다 담긴 사연도 가지가지다. 계곡을 따라 가면서 만나는 정자기행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 듯한 묘한 재미를 제공한다.
● 용추계곡
덕유산 자락인 기백산에서 발원했다. 깊은 계곡이 너무도 아름다워 진리(眞)를 찾게(尋)된다고 해서 심진동이라고도 부른다. 화림동, 원학동(지금의 거창)과 함께 안의3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계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계곡의 백미인 심원정을 만난다. 화림동의 농월정, 원학동의 수승대와 함께 삼가승경(三佳勝景)으로 불리며 최고의 절경을 자랑해왔다. 거제부사를 지낸 돈암 정지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초계 정씨 후손들이 1558년 세운 정자이다. 거북이를 닮은 너럭바위 구암 위에 앉은 정자는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청심담을 바라보고 있다. 주위의 농암, 재궁폭포까지 가세하면 시상이 저절로 떠오를 것 같다.계곡을 따라 난 길로 오르다 보면 매바위 인근에 우뚝 선 용추정이 눈에 띄며 여기서 더 가면 장수사 일주문이 나온다. 신라 소지왕 9년에 창건됐으나, 6ㆍ25전쟁때 일주문만 남기고 전소, 지금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절터를 끼고 왼쪽으로 나 있는 계곡으로 오르다 보면 15m 높이의 용추폭포와 맞닥뜨린다.
인근 지리산과 덕유산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폭포이다. 용트림을 하면서 떨어지는 힘찬 폭포의 모습이 장관이다. 폭포 뒤로 자연휴양림시설이 있어 야영객들이 즐겨찾는다. 기백산과 황석산 등산로도 잘 정비돼있다. 기백산 매표소 (055)963-4404, 용추자연휴양림 963-9611.
● 화림동계곡
남덕유산에서 시작한 물이 옥산천, 송계천과 합류하면서 아름다운 계곡을 만들어냈다. 대전-진주고속도로 인근 26번 국도를 따라 나 있다.
이 골짜기의 꼭대기가 육십령이다. 도적떼가 출몰할 정도로 길이 험해 장정 60명이 모여야 넘어갈 수 있었던 고개였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길이었지만 계곡 만큼은 예외였다. 너럭바위와 깊게 패인 담(潭)이 천계의 조형물처럼 빚어져있다.
빼어난 경치를 가진 담이나 바위 앞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세워져 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주위와의 조화가 뛰어나다. 태고적부터 정자와 담이 하나였을 것 같은 느낌이다. 계곡상류에 위치한 거연정이 시작이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구름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1613년 충주부사를 지낸 전시숙이 건립했다. 거연정 맞은 편에 자리잡은 군자정은 일두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1802년 후손들이 세웠다.
이 곳에서 2㎞ 하류에 있는 동호정은 통나무를 비스듬히 세운 뒤 도끼로 찍어 만든 계단이 운치있다. 여기서 계곡앞 너럭바위인 차일암을 바라보는 풍광이 뛰어나다. 1890년 장만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화림동계곡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농월정이다. 계곡에 비치는 달을 희롱하면서 풍류를 즐긴 풍류객들의 흔적이 물씬 배어있다. 지난 해 화재로 정자가 불에 타 없어졌지만 정자 앞에 펼쳐진 계곡만으로도 감탄사가 나온다. 정자를 새로 지을 때기까지는 무료입장. 주차비 2,000원. 함양군 문화관광과 (055)960-5530.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대전-진주고속도로를 타고 함양분기점까지 온 뒤 88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우회전, 함양IC에서 빠져나와 1084번 지방도를 따라 시내로 들어오면 상림숲과 만난다.
화림동계곡과 용추계곡 방면으로 가려면 대진 고속도로 지곡IC에서 나와 24번 국도를 따라 안의 방면으로 진행한다. 도로표지판이 잘 정비돼있어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하루 6차례 함양행 고속버스가 오간다. 소요시간은 3시간 가량. 인천에서는 안산, 수원을 거쳐 함양으로 향하는 버스가 하루 7차례 운행한다. 4시간20분. 부산에서는 2시간, 대구ㆍ마산ㆍ창원에선 30분 간격으로 시외버스가 다닌다. 함양시외버스터미널 (055)963-3281~2.
● 잠자리
규모가 큰 호텔급 숙박업소는 없지만 관광지 주변에 장급여관과 민박집이 많다. 선우장여관 (055)963-4117, 상림장여관 963-1170, 꿈의궁전 963-7704, 금호장여관 963-5500(이상 함양읍), 금성장여관 962-0267, 용추장여관 963-8056, 농월장여관 963-1933, 할매민박 963-7129(이상 안의면) 등.
● 먹거리
특별하게 내세울 만한 먹거리는 없으나 곳곳에 맛으로 소문난 집들이 숨어있다. 함양읍내에 있는 대성식당(055-963-2089)은 주변에서 가장 오래된 한정식집.
40년째 변함없이 이어오는 쇠고기국밥과 수육맛이 일품이다. 함양읍내에 자리잡은 염소불고기 전문점 돌담식당(055-963-3198)도 유명하다.
안의면에서는 안의원조갈비찜(055-962-0666)이 이름나있다. 갈비찜과 갈비탕 2가지 메뉴로 전국 식도락가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국내 방방곡곡에 안의갈비라는 상호를 사용하는 집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 집과는 모두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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