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준재벌급 기업 오너 2세인 A씨는 지난달 자신의 현금자산 50억원을 관리해주던 C증권사 지점에서 36억원을 인출해 미국 LA의 고급 저택을 샀다.거액 해외 송금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미국에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300만 달러를 출자한 뒤 이 법인 명의로 집을 사는 편법을 썼다.
D증권사 PB(프라이빗뱅킹)센터의 단골 고객인 B(58ㆍ개인사업)씨는 얼마 전 캐나다에 유학중인 아들 이름으로 밴쿠버에서 9억원 짜리 저택을 구입했다.
아들 3명과 부인까지 이미 밴쿠버로 이민 보낸 그는 올 여름엔 모처럼 미주지역으로 골프휴가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디 마음 편히 (돈을) 쓸 수가 있어야죠. 부자를 죄다 범죄자 취급하는데 무슨 재미로 한국에서 돈을 씁니까." B씨의 항변이다.
국내 부자들의 자금이 썰물처럼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투자와 소비의 양면에서 '탈(脫) 한국'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부동산이나 주식ㆍ채권에 넣어 두었던 돈을 회수해 해외투자에 나서는가 하면 국내에선 아예 지갑을 닫고 해외로 나가 돈을 펑펑 쓰기도 한다. "한국에선 더 이상 돈을 쓰기 싫다"는 불만과 절망감이 부자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듯 하다.
부자들이 씀씀이를 줄이면서 외환위기 때도 끄떡 없었던 강남 명품매장이 썰렁해졌고 부유층의 돈을 관리해주는 은행과 증권사 PB센터에는 부자 고객들의 거액 인출이 늘어나고 있다. D증권사 PB센터 관계자는 "사상 초유의 저금리와 주식시장 침체, 거기에 정치ㆍ사회적 불안감이 작용해 자산 분산 차원에서 해외투자로 눈을 돌리는 고객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명목상 해외투자라고 하지만 사실상 '재산 해외도피'에 가깝다. 금융계에 따르면 일부 기업들은 홍콩 등 해외 관계회사에 높은 비율의 이익을 넘겨주는 수법으로 재산을 해외에 빼돌리기도 한다. 홍콩의 한 외국계 금융기관 관계자는 "최근 50억원 이상을 맡기는 한국인들이 많다"면서 "한국에서 자금을 빼내는 방법을 문의해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상당수 부유층은 자녀와 가족들을 해외로 유학 보내거나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해 1인당 연간 10만달러까지 허용되는 유학생 송금 등의 방식으로 노골적으로 재산을 빼내기도 한다. 유학 및 연수 경비용 해외송금은 올들어 5월말까지 8억9000만달러(약 1조297억원)로 작년 같은 기간(6억7,000만달러)보다 32.9%나 급증했다.
한국은행 집계 결과 이미 해외로 이민간 부유층이 국내 남아있는 재산을 반출한 금액도 올들어 7억달러(8,099억원)로 작년보다 27.3% 증가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연구위원은 "경기침체로 부자들이 국내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데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안감과 사회 전반의 반(反)부유층 정서가 자금 해외이탈을 부추기고 있다"며 "국내에서 안심하고 투자ㆍ소비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호섭 기자 dream@hk.co.kr
■"눈총 안받고 편해" 원정 소비
"부자들이 국내에서는 땡전 한푼 안 써요."
26일 저녁 서울 강남구 청담동 고급 여성의류전문점 R매장. 한벌에 수백만∼수천만원짜리 여성 맞춤옷이지만 손님이 하도 많아 바겐세일 같은 것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던 가게다. 그런데 이날은 하루종일 손님 3, 4명이 왔고 물건을 사간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 매장은 결국 지난달 처음으로 가격인하 상품을 내놓았다. 차모(43·여) 사장은 "브랜드 가치를 생명으로 하는 고급매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올들어 장사가 워낙 안돼 달리 방법이 없다"며 "최상위 부유층들조차 '돈이 있어도 국내에서는 쓸 데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고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남 한 백화점의 해외 명품매장은 예년에 비해 고객 감소가 확연하다. 유명 패션브랜드를 판매하는 A씨는 "차라리 홍콩이나 이탈리아, 일본에 나가 쇼핑을 즐기는 부자들이 늘었다"며 "외국에 나가면 한국 부자들이 VIP 대접을 제대로 받는다는데 여기선 마음 편히 돈을 못쓰겠다는 고객들이 많다"고 전했다.
강남 부유층의 대표적 소비 품목인 수입차 판매도 부진을 겪기는 마찬가지. 지난해까지만 해도 1개월에 200대 넘게 팔리던 최고급 승용차 BMW 7시리즈는 지난달 겨우 124대가 나갔다. 수입차업체 관계자는 "부자들이 골프나 자녀유학을 위해 해외에서 뿌리는 돈은 급증한 반면 국내에선 금고를 걸어 잠그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들어 5월말까지 해외여행을 통한 외화 유출은 34억8,000만달러(4조253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5% 늘었고 유학 및 연수 경비용 해외송금도 8억9000만달러(1조297억원)로 전년 동기(6억7000만달러)보다 32.9% 증가했다. K은행 관계자는 "최근 미국의 비자요건이 까다로워지면서 학생비자를 아예 취업비자로 바꿔주기 위해 고액을 송금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일본을 자주 방문하는 사업가 정모(41)씨는 이달 초 일본 도쿄(東京) 신오쿠보(新大久保) 코리아타운의 재일동포 부동산업자를 통해 2억원을 주고 원룸형 맨션 한 채를 샀다. 정씨는 "부동산을 사러 일본에 오는 강남 부자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면서 "잘 아는 부동산업자는 지난 1개월 간 빌딩 등 10억원대 부동산 4건을 팔았고 골프회원권을 사달라는 주문도 수두룩하게 받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 부자들이 국내에서 돈을 안 쓰고 해외소비·투자를 늘리는 데는 '불황'과 '불안'이라는 두가지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경기 침체가 상당히 심각해지면서 부유층도 안심할 수 없게 된데다 부동산과 금융자산에 대한 세금이 불어나고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 한 증권사 부자 고객 담당자는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흉악 범죄의 표적이 되는 등 우리 사회의 심각한 '반 부유층 정서'도 이들의 '탈 한국'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이들은 해외에서 욕 안 먹고 벌어 놓은 돈을 마음 편히 쓰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마다 올들어 1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의 이탈이 20여건 이상씩 보고돼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며 "부동산 투기 등으로 벼락부자가 된 고객이 아니라 사업 등을 통해 벌어들인 고액을 수년간 맡겨온 전통 부자의 이탈이 두드러진다"고 우려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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