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왼쪽 귀퉁이에 허름한 셔츠차림의 남자가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있다. “고객은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총알 세례를 받아도 끄떡하지 않는다는 스웨덴제 냄비회사 사장(최정우)의 말씀이다. 부장(이무영)은 세일즈의 핵심은 고객이 오르가즘을 느끼는데 있다는 흰소리를 한다.
인생 막장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입사한 병호(김영민)는 노트에 코를 박고 받아 적느라 바쁘다. 무대 왼쪽 등이 꺼지기 바쁘게 무대 오른쪽에 불이 켜진다. 베르디의 ‘레퀴엠’ 가운데 ‘진노의 날’에 맞춰 이층 무대에선 열광적인 푸닥거리가 한창이다. 교주(고수희)가 이끄는 신흥종교 집회 속에 병호의 아내(권지숙)가 있다.
세일즈 교육장면과 집회장면을 빠르고 정교하게 교차 편집하는 이 대목이 객석을 식혔다, 데웠다 한다. 여기에 뼈가 녹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 수술비를 위해 보험사기를 노리는 택시기사 종학(신덕호),그리고 옌볜 출신으로 식당에서 일하며 몸도 파는 정자(배두나)의 이야기가 한겹씩 얽혀 들어간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서민의 삶을 그린 ‘선데이 서울’은 이런 영화적 문법을 차용한 블록버스터급 연극이다. 연출은 ‘청춘예찬’의 박근형이며, 극본은 박찬욱 이무영 감독 등이 썼고, 제작과 주연을 배두나가 맡았다. 박근형이 이끄는 극단 골목길의 무대와 앙상블은 한층 세련된 모습을 선보였다.
올 봄 대학로극장에서 옹색하게 ‘삼총사’의 무대를 차렸던 데 비하면, 정미소극장에 세운 무대는 인상적이다. 녹슨 철제셔터를 극적으로 활용한 매우 드라마틱한 무대다.
그런데 왜 ‘선데이 서울’인가. 가슴을 드러낸 스타들의 컬러화보, 사회의 이면을 비추는 르포기사, 그리고 성인용 만화가 뒤범벅된 1970년대 동명의 대중문화잡지와 연극 속에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서민들이 무슨 상관인가. 두가지 점에서 ‘선데이 서울’은 사라진 통속잡지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다.
첫째는 ‘한국에서 가족으로 산다는 것’의 문제를 늘 엉뚱하고 기발하게 파헤쳤던 박근형의 ‘선데이 서울’식 연출이다. 여배우의 젖가슴과 구두닦이에 관한 르포기사, 진지한 인터뷰와 조잡한 편집이 묘하게 어울린 잡지처럼 연극은 은근히 선정적이다.
둘째는 폐간된 잡지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밑바닥 인생들의 운명이다. 종학의 아내(김광덕)가 가족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 링게르 호스를 자르는 장면처럼, 연극은 슬며시 관객의 가슴 속으로 젖어 든다. 8월15일까지. 대학로 정미소극장(02)3672-6989.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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