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북한 경비정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사건이 일어난 후 청와대, 정부, 여당의 대응은 혼란 그 자체였다. 혼란의 극치는 24일 조영길 국방장관의 국회 답변이었다.조 장관은 해군 작전사령관과 합동참모본부가 남북 해군 간 무선교신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고의 누락'이었다고 말했다. '판단 착오'였다고 밝힌 정부합동조사반의 발표를 하루 만에 뒤집는 발언이다. 엄청난 말을 하는 조 장관의 얼굴은 태연했고, 그 태연함이 국민을 더욱 경악케 했다.
조 장관은 "무선 교신 사실을 보고할 경우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고, 상황종료 후 보고하자니 사격에 대한 언론 등의 비판으로 북측에 역이용당할 것을 우려해 보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심각한 국기 위반 사안이지만, 대통령이 경고조치를 지시한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군의 사기를 고려해 관용을 베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청와대는 서둘러 해명했다. 조 장관의 발언은 이미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으로 새로운 내용이 아니며, 합동조사반 발표에서는 그 부분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또 "대통령의 관용을 강조하기 위해 조 장관이 그 같은 말을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들을수록 기가 막힌다. 대통령에겐 이미 보고되어 '새로운 것'이 아닌 내용을 왜 국민은 몰랐나. 합동조사반 발표에서 '고의 누락'을 생략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대통령의 관용을 칭송하는 국방장관의 '용비어천가'를 통해 국민은 겨우 진실을 엿들어야 하나.
국민은 이런 식의 혼란에 지쳤다. 큰 일이 터질 때마다 권력 핵심부에서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오는 설익은 주장들에 국민은 짜증이 난다. 그 동안 서해에서 크고 작은 남북 간의 충돌이 자주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사건 자체보다 군의 보고 누락과 그에 대한 여권의 대응이 더 나라를 시끄럽게 했다.
해군이 경고 사격 과정에서 남북 간에 무선 교신이 있었음을 보고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지자 여권에서 격렬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이 사건의 핵심은 '보고 누락'이 아닌 '허위 보고'라고 주장하면서 강도 높은 책임자 문책을 요구했다. 뿌리깊은 피해의식도 발동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다. 국방장관 문책이 다가 아니다. 지금 군 간부들은 군사정권에서 지도력을 키운 사람들인데 그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군 통수권자에 대한 허위 보고도 심각하지만 남북 평화체제를 가볍게, 허술하게 처리한 군 당국의 의식에 대해 심각한 접근이 있어야 한다."
이런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국방부 보고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하자 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돌았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북측의 거짓말이나 잦은 NLL 침범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안 하고 우리 군의 잘못만 문제 삼는다는 비판적인 여론도 고개를 들었다.
군이 통수권자를 인정하지 않아서 허위 보고를 했다는 듣기 거북한 공격, '군사정부에서 키운 사람들' 운운하는 딱한 주장에 국민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수습해야 하는 대통령에게 '관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국방장관이 "심각한 국기 문란으로 단호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안에 대해 대통령은 결국 경고조치라는 솜방망이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여권의 시퍼렇던 서슬을 생각하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공연히 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놓고 군율을 해치면서까지 관용을 베푸는 게 올바른 통치인가.
이번 사건은 노무현 정부의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서해교전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미숙한 지도력이다. 지도력의 위기가 국가 정체성의 위기로 확대되지 않도록 신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장명수/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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