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아버지. 저, 장남 수업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도 ‘우리 장남이 변호사야’라고 자랑하시던 그 아들, 수업입니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받은 거에 단 1%도 못 갚았는데 아버지는 먼 곳으로 떠나시고, 저는 어느새 나이 육십이 넘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 품 안에 안겨있을 것 같았던 이 아들이 말입니다.
생각나시죠? 제가 3전4기 끝에 고등고시에 합격한 1961년 겨울이요. 그 해 겨울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농아인 누나는 못된 매형 때문에 차가운 한강에 투신 자살했고, 동생 옥희는 이상한 놈하고 동거에 들어가 한 3개월 집에 안 들어 왔었죠. 막내 대업이도 말썽만 부리고…. 그 잘난 고시에 3번이나 떨어져 놓고도 뻔뻔하게 공부만 하던 이 장남 놈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그 시절 서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본격적인 근대화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장면 총리시절. 서울의 전화번호 국번은 단 한 자리였고, 틈틈이 사보던 ‘현대문학’이 400환이던 그 때, 서울은 왜 그리 을씨년스럽고 추웠던지요. 똥을 아무데나 싸대는 말들을 끌고 도심 한복판을 걸어가던 마부들은 왜 그리 남루했고, 달동네 우리 집 마구간과 여물냄새는 또 왜 그리 심했던지요. 지금 제 아이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 황량한 겨울 한복판에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다리를 다쳐 마부 일을 못하신 그날, “내일부터 지게라도 지겠다”는 저에게 아버지는 그러셨죠. “내 끝까지 애비노릇할 테니 너는 붙기만 해라”라고요. 13세 때 할아버지 따라 만주로 가서 1년도 안 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리 밑에 시신을 묻고는 살 길이 걱정 돼 엉엉 우셨다고도 하셨죠.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굵은 눈물을 봤습니다.
가난해서, 마부의 자식들이라는 놀림이 서러워서 저희 4남매는 울 줄만 알았지, 아버지도 눈물 가득한 삶을 사셨을 거라는 건 왜 몰랐을까요. 돈 좀 있다고 으스대며 사람 무시하던 말주인 집 내외, 빌린 돈 빨리 갚으라고 닦달하던 서기(書記) 아저씨…. 막내가 속썩일 때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통곡 소리를 우리 형제들은 왜 그리 쉽게 잊어먹었는지요. “이 사람아, 나는 마차 끈 죄밖에 없는데, 왜 이리 나를 힘들게 하는가.”
아버지는 그러면서도 소박하고 정 많은 분이셨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마부들에게 언제나 “놀러 와”라고 하시던 그 말 한마디. 말주인 집에서 식모살이 하던 아주머니에게 300환짜리 호박떡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슬쩍 건네주시던 그 정. 가출했던 옥희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그저 눈 한번 ‘찡긋’하고 슬며시 미소짓던 넉넉한 분이 바로 아버지셨습니다.
중앙청 앞 게시판에 제 이름 석자 ‘하, 수, 업’이 붙은 함박눈 내리던 그날, 이 못난 아들 놈에게 아버지는 “붙었구나”, 단 한마디만 해주셨죠. 그러나 그 치장 없는 외마디는 훗날 제가 살면서 들은 어떤 진수성찬의 축하보다 더 풍성하고 진심 어린 것이었습니다. 못 배우고, 괄시받고, 별다른 삶의 즐거움도 없이 한평생을 살아온 아버지가 제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어린애였다면, 넓고 넓은 아버지 등에 업혀 다시 한번 잠들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러죠. 애 낳아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그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부모가 돼도 자신의 부모만큼 자식들에게 베풀지 못하는 거라고, 그렇게 계속 모자란 채로 대대손손 부모 마음은 전해지는 거라고. 물 한 바가지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책 사보라고 꼬깃꼬깃 주머니에 숨겨뒀던 돈을 건네주던 아버지의 깊은 정을, 제가 어찌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게 그립습니다. 아버지의 못 박힌 손, 닳고 닳은 허름한 외투…. 아버지는 지금도 마포의 대폿집 한 구석에 친구 분들과 앉아, 자식 자랑에, 당신의 지나온 삶의 회환에 취해 소주 잔을 기울이시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
못난 자식 수업 올림.
김관명 기자 kimkwmy@hk.co.kr
■그때 한국일보에는-"토착적 인간상 흥행안타"
김승호(하춘삼), 황정순(수원댁), 조미령(옥례), 신영균(수업), 엄앵란(옥희) 등 옛 스타들이 총출동한 강대진(1935~1987) 감독의 ‘마부(馬夫)’는 1961년 2월15일 개봉한 서울 국제극장에서만 15만명이 관람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해외영화제 수상(제11회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의 기염도 토했다.
그 해 7월6일자 한국일보는 ‘토착적 인간상에 열심, 흥행적으로 안타연발, 화제의 강대진 감독’ 이란 제목 기사에서 ‘마부’를 이렇게 평가했다. “ ‘마부’는 제명이 말하듯 한국적 체취가 우직하게 물씬한 작품이다. 김승호와 ‘타이ㆍ업’하여 토착인간상을 부각하려 들었다. 토착적 세계와 ‘휴맨’한 주제에의 집착, 이런 것은 국적 부재의 영화가 횡행하는 오늘의 우리 영화계를 생각하면 ‘유니크’한 노력인 것이다.’
이 기사에는 베를린영화제 수상 직후 강 감독의 인터뷰도 실려 눈길을 끈다. “우리 영화가 버려왔던 영역, 나의 심성에 맞는 서민, 그것도 토착적 서민의 세계를 그린 작품을 고집해왔지요.” “해외에서 수상한다고 마냥 같은 경향 속에서 정체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기의 재래적 세계를 탈피하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감행하겠습니다.”
한국일보에 실린 ‘마부’의 영화광고 문구도 재미있다. ‘우리의 생활단면을 묘사한 금년도 히트작’ ‘과부 식모와 홀애비 마부간의 구수한 사랑의 금자탑’ ‘연일 대매진, 구정 프로의 왕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