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컴퓨터에 글을 쓰고, 그것을 인쇄하면 마치 책 속에 쓰여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글자들이 인쇄된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런 것을 꿈도 꿀 수 없었다.고등학교 시절 내가 쓴 몇 편의 산문을 모아 얇더라도 책 한 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시내 문구사에서 등사용지를 사고, 그 등사용지에 글씨를 쓰는 철필과 철판은 선생님의 것을 빌렸다. 그때는 학교시험도 선생님들이 등사용지에 철필로 긁어, 그리고 그걸 다시 검은 잉크의 등사기로 밀어 시험지를 만들었을 정도로 인쇄물이 귀했다. 그 시절, 내 옆에 앉은 친구는 시를 썼다. 그 친구가 공책에 쓴 시를 보여줄 땐 그저 그랬다. 그런데 한 학년이 끝나면서 받은 교지에 실린 그 친구의 시가 갑자기 세계의 명시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전의 것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데도 그랬다.
뒤늦게야 그것이 책과 활자의 엄숙함 때문인 것을 알았다. 똑같은 글도 그것이 공책에 쓰여 있을 때와 책에 반듯하게 활자의 옷을 입고 있을 때 읽는 느낌이 다르다. 세월이 좋아져 집집마다 있는 컴퓨터와 프린터가 아무리 예쁘게 인쇄를 해내도 책 속의 활자는 여전히 엄숙하기만 하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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