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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보다 뜨거운 "사상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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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보다 뜨거운 "사상 공방"

입력
2004.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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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정부가 민생 뒷짐 갈등만 증폭"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국가정체성 위기론을 내세워 연일 대여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박 대표는 22일 운영위 회의에서 "헌법에서 규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라며 "야당이 나서 나라를 바로잡고 근간을 지키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전날 언급한 '대여 전면전'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박 대표는 이날 여권을 국가 정체성 수호세력이 아닌 파괴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데 정부가 경제 살리기 등 시급한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국민갈등을 증폭시키는 일만 벌리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그는 여권의 보안법 개폐, 북한의 NLL침범과 관련한 청와대의 군 질책,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여권 내 386비판, 송두율씨에 대한 법원 판결 등을 정체성을 뒤흔든 사건으로 들었다.

그는 현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 "방향이 틀렸다"고 단언했다. "국민을 더 잘살게 하는 게 개혁인데 국민을 불안케 하고 경제를 위축시키는 등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박 대표는 여권의 각성을 압박하기 위해 종전의 '상생정치'를 거둬들이고 투쟁을 택했다. 그는 "상생 정치란 여당을 위한 정치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은 박 대표의 강수를 뒷받침할 구체적 방안을 본격 모색하기 시작했다. 염창동 당사와 국회에서 열리는 온갖 회의들도 박 대표의 결정을 지지했고, 최고위원 등 주요 당직자들이 국가정체성 위기를 한 목소리로 외치며 여권을 거칠게 비난했다.

남경필 원내수석부대표 등 일부 당직자는 "국가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색깔론과는 전혀 다른, 말 그대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며 여권의 색깔론 공세에 대한 방어막도 쳤다.

당내에서는 이를 통해 당의 근간인 보수 세력을 한 데 묶고 정국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 대표 입장에서도 당 장악력을 강화하고 자연스레 '박근혜 대세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카드인 만큼 주저할 게 없다는 표정이다. 실제 박 대표의 대여강공 드라이브는 전당대회 이후에도 잦아들지않고 있는 그의 지도력에 대한 당 일각의 회의론을 쑥 들어가게 했다. 외부에 강력한 전선을 형성해 지지 층을 결속하고 당내 분란을 잠재웠던 과거 야당 대표의 생존전략이 그대로 준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로 미루어 박 대표가 주도하는 대여공세는 결코 일과성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박 대표 스스로도 "원내과반수까지 차지한 거대 여당의 횡포에 맞서 야당이 할 일이 뭐가 있느냐" 며 현 단계에서 대여투쟁 이외에 대안이 없음을 천명한 바 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열린우리당, "독재 향수병 걸린 탤런트 정치"

열린우리당은 22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대한민국 정통성을 훼손하고 나라를 부정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전날 '대여 전면전' 발언에 이어 정부·여당을 강력 비난한 데 대해 '아프리카 반군' '군사독재 향수병' '허공을 향한 헛발질' 등 격한 표현을 동원해 반박했다.

우리당은 박 대표의 잇단 대여강경 발언 배경과 관련, 야당 내 일부 강경론자의 압박을 수용해 국면을 전환하는 한편 보수세력을 결집하려는 포석으로 분석한다. 이와 함께 '박근혜 패러디' 파문과 친일진상규명법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포함된 데 대한 박 대표의 '사적인 감정'이 배어있는 것으로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김현미 대변인은 이날 오전 장문의 논평을 발표, "박 대표는 구체성과 알맹이 없는 대표적 정치인"이라며 "제1야당 대표가 대안 없는 비판과 대책 없이 듣기 좋은 소리만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반복하고 있으니까 한나라당 내에서도 '컨텐츠가 없다' '탤런트 정치'라는 말이 나온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또 "박 대표야말로 시장 경제주의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분양원가 전면공개와 백지신탁제도 도입에 앞장서지 않았느냐"면서 "박 대표의 경제관은 재벌편들기와 대중영합주의의 짬뽕"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친일진상규명법과 국가보안법 개폐문제를 비난하면서 대통령을 끌어들이는 것은 정당정치에 대한 몰이해로 구정치 패러다임"이라며 "박 대표야말로 모호한 어법으로 남의 정체성을 거론하기 전에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민병두 기획위원장도 기자간담회에서 "어젯밤 '전면전 한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난 줄 알고 잠을 못 잤다"면서 "1990년대 이후 어떤 정치인이 그런 표현을 썼는지 놀랍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정세균 의원은 "도대체 무슨 소리냐"며 "우리는 민생·경제 살리기에 매진할테니 한나라당은 과거처럼 색깔론만 제기하라"고 힐난했다. 또 최용규 의원은 "박 대표는 원수 계급장 달고 청와대로 들어가 아버지처럼 되겠다는 이야기냐"고 공박했고, 우상호 의원은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야당을 자극했거나 탄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가운데 신기남 의장 등 일부 당직자가 "정치인이 말 한마디 했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며 신중한 대응을 주문했으나 오히려 의원들로부터 "지도부가 엇박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눈총만 받았다.

/김성호기자 shkim@hk.co.kr

■민주노동당,"낡은 냉전 잣대"

민주노동당은 22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이념 공세를 "독재와 냉전시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만족해 하는 박 대표의 퇴행적 나르시스즘"이라고 비난했다.

천영세 원내 대표는 이날 "불과 어제까지도 선명한 정책 대결을 펼치자던 박 대표가 왜 갑작스레 돌아선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며 "정부나 여당의 정책이 문제라면 사안별로 대안을 제시하거나 비판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노당은 박 대표가 정국을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결로 몰아가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천 대표는 "이는 결국 수구보수세력의 결집을 위한 방향 전환"이라고 쏘아 부쳤고, 심상정 의원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옥 죄었던 반공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시대 흐름에 대한 역행"이라고 비판했다.

김성희 부대변인은 논평에서 "아직도 긴급조치가 횡행하던 박정희 시대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범인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우려스럽다"며 "낡고 짧은 생각으로 한나라당이 어떻게 선진화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고 말했다.

당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의 공세가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에서 일고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에 대한 선제 공격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심상정 의원은 "박근혜 체제 출범과 함께 국보법 폐지나 친일진상규명 등 과거 문제에 대한 개혁적 움직임을 견제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한편 전날까지 양당 대표 회동 등 한나라당과의 공조에 적극적이었던 민노당에는 "이제 더 이상의 공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견해가 늘고 있다. 천 대표는 "한나라당의 이후 행보를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분명히 잘못된 정치 공세를 한 것인 만큼 양당 관계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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